경천사 석탑 반환 이끈 헐버트 박사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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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 석탑 반환 이끈 헐버트 박사 기고문
  • 서정필 기자
  • 승인 2018.08.2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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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기고문 실은 1907년 4월 4일자 ‘재팬 크로니클’ 지면 공개

▲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 맨 안쪽에 전시돼 있는 국보 제86호 ‘경천사 10층 석탑’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 맨 안쪽에는 국보 제86호 ‘경천사 10층 석탑’이 놓여 있다.

기단과 탑신에 조각이 섬세하게 새겨진 높이 13m의 이 걸작은 원래 현재 북한 개성 부근 풍덕군 부소산 소재 경천사에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1907년 1월 일본 궁내부대신 다나까 미스야키가 순종의 결혼식 축하 사절로 이 땅에 왔다가, 무단으로 경천사 석탑을 해체해 수레에 실어 개성역까지 운반한 뒤, 철도로 부산으로, 다시 부산에서 일본까지는 배편으로 옮긴 뒤 자기 집 뒤뜰에 세웠다.

그렇다면 일본에 있어야 할 이 유물이 어떻게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 헐버트 박사의 의 1907년 4월 4일 자 재팬크로니클지 기고문 (사진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는 지난해 8월 일본 요코하마 개항박물관을 방문해 호머 헐버트 박사가 1907년 당시 일본 고베에서 발행되던 영자지 ‘재팬크로니클’에 기고한 ‘한국에서의 일본의 만행’ 기고문 원문을 입수했다. 또한 함께 실린 신문 해설기사 ‘누가 석탑을 훔쳐갔는가?’는 이번에 처음 발견됐다.

김동진 (사)헐버트기념사업회장은 8월 9일 “지난해 8월 일본을 방문해 기고문과 해설기사 원문을 입수했다”며 “재팬 크로니클은 1907년 4월 4일자 통신란에 헐버트의 기고문과 해설기사를 실었다. 특히 해설기사는 헐버트 박사의 기고가 석탑 반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헐버트 기고문에 대한 재팬크로니클지 해설기사 (사진 (사)헐버트기념사업회)

헐버트는 그해 3월 23일 자로 원고를 완성해 신문사에 보냈고 '재팬크로니클'은 1907년 4월 4일 자 통신란에 이 기고문을 실었다.

헐버트가 기고를 결심한 배경은 일본 영자신문 ‘재팬메일’이 영국인 베델 등이 발행하던 코리아데일리뉴스의 석탑 약탈 보도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헐버트 박사는 이 기사에 분노해 개성으로 달려가 석탑 약탈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모든 정황을 파악한 뒤 ‘재팬크로니클’에 ‘재팬메일’에 대한 일종의 반박문을 보낸 것이다.

헐버트는 기고문에서 사건의 전말을 누가 들어도 다나까의 약탈을 부인할 수 없도록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내용을 간추리면, 헐버트는 3월 19일 경천사를 찾아 석탑이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석탑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소문대로 파괴된 석탑의 기반석만 남아있고 파편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이어 헐버트는 파괴 현장을 목격한 주민 열 댓명을 만나 자세한 실상을 파악했다. 그들 증언에 의하면 총으로 무장한 80여 일본인들이 2월 18일에 몰려와 석탑 주위에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비계를 설치하고 석탑 해체 작업에 나섰고 해체에는 7~8일이 걸렸다.

헐버트는 증거 확보를 위해 현장 사진을 찍었다. 석탑이 있던 자리, 나뒹구는 파편, 수레바퀴 자국 등을 낱낱이 찍었다. 그리고 그는 ‘재팬크로니클’지 편집진에서 사진 설명과 함께 기고문과 사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한국인들을 통해 얼마 전 석탑이 이곳에서 기차에 실렸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재팬 크로니클은 ‘누가 석탑을 훔쳐갔는가?’ 제하의 해설기사에서 “헐버트 씨의 기고문과 사진 증거로 볼 때 본지는 일본이 이 문제가 논란이 되기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석탑의 약탈은 일본이 보호통치 이래 한국인들에게 자행한 어떤 행위보다도 가혹한 행위”라고 보도했다.

이 해설 기사에서 중요한 대목은 헐버트가 보낸 현장 사진의 역할이다. ‘재팬크로니클’은 헐버트의 기고문과 현장 사진을 바탕으로 최초로 일본인의 석탑 약탈을 공식화했다. 헐버트의 현장 사진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석탑 약탈을 부인해오던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이기사로 인해 더 이상 발뺌을 할 수가 없게 됐다.
 
▲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유공자 호머 B, 헐버트 박사의 69주기 추모식이 8월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100주년 선교기념관에서 열렸다. 추모식 참석자들

결국 그해 만국평화회의를 보도하던 ‘만국평화회의보’를 비롯해 ‘뉴욕 포스트’ ‘뉴욕 타임스’ 등 국제적 신문들이 이를 받아 대서특필하면서 당황한 세계 곳곳의 일본 외교관들은 물론 서울의 통감부마저 석탑 반환을 일본 정부에 요청하면서, 1918년 석탑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나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세월이었다.

이후 석탑은 40여 년 동안 해체된 상태로 방치돼 오다가 1959년에 훼손된 부위를 시멘트로 복원했고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됐다. 하지만 1995년 풍화작용과 산성화 등 문제점이 노출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해체 보존 처리 과정을 밟았고, 그로부터 10년 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를 잡았다.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 박사가 재팬 크로니클에 보낸 현장 사진은 당시 제작 여건상 신문에는 실리지 못했다”며 “1940년 재팬 크로니클을 인수한 ‘재팬 타임스’에 이메일을 보내 당시 사진을 찾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래전 일이어서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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