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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역사산책]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서문1948년 9월 15일, 민세 안재홍 글
이형모 발행인  |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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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7  15: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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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상고사’ 표지
단재는 천재적 사학자, 열렬한 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구한말에 낳은 천재적 사학자이자 열렬한 독립운동자이다. 그 천성의 준열함과 안식의 예리함은 시속의 무리들이 따를 수 없었던 바였고, 사상의 고매함은 스스로 세속에서 한 걸음 벗어나던 바였고, 그의 ‘조선상고사’는 그의 유저들 중에서 가장 이채(異彩)나는 것이다.

단재는 충북 청주 출신이고,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1880년 11월 7일 태어났다.

그는 이미 약관의 나이에 사상혁명과 신도덕 수립에 뜻을 세운 바 있었는데, 그때는 마침 청‧노‧일 세 제국이 서로 침략하던 시기를 만나 5천년 조국의 명맥이 날로 기울어가고 백성들의 우울함은 걷잡을 수 없었던 때였으므로, 서울의 평단에 나선 단재는 억누를 수 없는, 북받쳐 오르는 젊은 정열을 항상 한 자루 붓으로 사회에 드러냈고, 이로써 민족의 심장을 쳐서 움직였다.

신문 주필로 민족정기와 사상개혁의 선봉

그가 주필로 있었던 황성일보와 대한매일신보는 아마 그가 청년시대의 마음의 집으로 삼고 살았던, 꺼지지 않는 꿈의 자취라고 할 것이다.

그는 국정의 득실을 통렬히 논파하였고, 당시 인물들의 장단을 포폄하였다. 더군다나 당시 사상의 오탁과 도의의 저하에 분개하여 그 병인(病因)이 국가의 사통(史統)이 바로잡히지 못함과 민족정기가 두드러지지 않음에 있음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이 옛 선비들의 역사 왜곡과, 가치의 전도와 시비의 착오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신 단재는 엄연히 당시 국민사상 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는 계속되는 정론 외에도 ‘독사신론’을 쓰고 ‘을지문덕’을 쓰고,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쓰고, ‘이순신전’을 쓰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도 쓰고 때로는 전대의 한시나 읊조리는 인사들의 고루한 견해를 논박하였는데, 이 모든 것을 민족의식의 세련과 앙양에, 국풍의 진작과 선양에 그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온몸으로써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버티고 섰었다.

무술년에 압록강 건너 망명

그러나 넘어가는 큰 집을 그 혼자 몸으로 지탱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무술년의 변국에서 일제의 끝없는 야망이 드디어 반만년의 조국을 통째로 삼키려는 것을 차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맨몸으로 표연히 조국을 떠나면서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로 추풍을 맞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이로부터 그는 혹은 남북 만주로, 혹은 시베리아로 찾아다니느라 사시랑이(가늘고 약한 사람이나 물건)의 생애가 안주할 줄 몰랐다.

혹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톡)의 한국 교포와 함께 석판으로 신문사를 경영하기도 하고, 혹은 유랑하는 독립투사와 함께 신발 끈을 들춰 메고서 동구(洞溝)의 폐허 대고구려의 황성(皇城)에서 옛 왕릉의 비갈(碑碣 :비석)을 더듬기도 하였다. 그러나 빈곤은 항상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세상사는 가시덤불처럼 거칠어만 갔으므로 아프고 한 많은 삶의 지속이었다.

그가 북경의 여관에서, 남경‧상해의 골목에서, 모진 추위, 호된 더위 속에 그 맵고도 날카로운 비판의 눈을 부릅뜨면서 긴 한숨, 짧은 걱정, 높은 꾸지람, 나직한 군소리에 비바람 눈서리, 뜨고 지는 해와 달, 열 해 스무 해 거푸 거듭 지나는 동안 기미운동이 터지고, 임시정부가 나타나고, 독립신문이 간행되어, 단재는 득의의 붓대를 고쳐 잡고 민중의 마음의 거문고를 켕기고, 퉁기고, 울리어 곁들이어, 높고 웅숭깊은 소리 천하에 들리게 하기를 또 수년이나 하였다.

원래 천성이 너그럽지 못하고, 가부가 분명한 단재였는지라 맡겨오는 붓(신문사의 주필 자리나 글 부탁)을 스스로 던져버리고는 다시 연경의 누추한 골목과, 몽고의 두메와, 진과 송의 옛 나라를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느라 한갓 해외 망명의 슬픔만을 절절히 간직한 채 고향 그리는 정은 일으킬 겨를조차 없었다.

여순 감옥 10년 구금 후, 1936년 옥사

그러다가 드디어 무정부주의 결사에 간여하여 교활한 일본 경찰의 손에 붙들리어 여순 감옥에 10년이나 구금당하였다가, 마침내 수의도 벗지 못한 채 적국 수졸의 싸늘한 눈길 속에서 다시는 못 돌아올 길을 떠났으니, 그날은 병자년(1936년) 2월 21일 오후, 유한 깊고 깊은 잊지 못할 날이다.

단재는 한 많은 일생을 57세로, 원수의 적국 일제의 기염이 바야흐로 높아가던, 아니 실은 단말마의 발악을 한창 벼르던 그때, 조국 재건은 먼동의 서광일 뿐 차마 바라볼 수 없었던 그때에, 가장 쓸쓸하게, 그러나 조국 재건의 광채가 두루 퍼져 비치는 가운데 기쁨으로 술렁댈 조국의 대중들을 그리워하면서, 이 생을 떠났다.

단재의 일념

단재의 일념은, 첫째는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처 못 된다면,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서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바람에 불려 다니는 나그네의 몸이면서도, 참고서류를 구하기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사 연구초’를 쓰고, ‘조선상고사’를 쓰고, ‘조선상고문화사’를 썼고, 또 복고(시나 글이나 책의 내용을 머릿속에 구상해 놓은 것.)로는 ‘정인홍공 약전’과 ‘육가라국고’(6가야국) 등을 구상해 놓았었다. 그러나 ‘조선사 연구초’ 외에는 혹은 그 원고가 도중에 분실되는 일도 있었고, 또는 머릿속에 다 외워둔 채 미처 붓을 들어 쓸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 아깝기 짝이 없다. 이제 유지들의 노력으로 ‘조선상고사’가 나오게 된 것은 공사(公私) 간에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단재는 나보다 나이도 11세 앞섰고, 내가 서울에서 아직 중학을 다닐 때 단재는 이미 지도층의 명사였다. 나는 우연히 단재를 서울의 동숙하는 하숙집에서 만나 보았고, 다음 1913년 중국 계해혁명 때에 상해의 여관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단재를 항상 존경했다

내가 조선일보를 운영할 때 ‘조선상고사’(1931. 6. 10 ~10. 14.까지 103회)와 ‘조선상고문화사’(1931. 10. 15 ~ 12. 3, 1932. 5. 27. ~ 31.까지 40회)를 그 학예란에 매일 연재하였다.

후일 단재는 면회를 간 기자에게 “그것은 아직 미정고(미완성 원고)이니, 퇴고(수정)를 가할 여지가 있다.”고 하였다. 단재로서는 미흡하게 생각하였던 것이고, 간혹 가다가 그러한 점도 있겠으나, 조선 사단(史壇)과 학계의 하나의 귀중한 보배임에는 틀림없다.

위와 같은 인연이 있어서 이에 감히 무사(蕪辭)를 지어 첫 머리에 적는 바이다.

단기 4281년(기원 1948년) 9월 15일
한성일보 누상에서
민세 안재홍


*민세 안재홍(1891.12.~1965.3.)
평택 출생.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졸업. 1919년 상해 망명. 귀국해 중앙고보 교감 지내며 3.1운동 당시 시위를 지도했다. 1923년 시대일보 창간, ‘조선일보사 사장 겸 주필로 10년 재직. 신간회 총무로 활약하다 8개월 간 복역. 1936년 임시정부와의 내통이 발각되어 2년 간 복역.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1년 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고대사 연구에 몰두,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애썼다. 1947년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지냈고, 1950년 9월 6.25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사망했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의 이 책은 처음에 <조선사>란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어(1931.6.10.~10.14.까지 103회) 당시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를 1972년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단재 신채호전집>을 간행하면서 <조선상고사>란 이름으로 바꾸어 출판하고, 그 후 1977년 다시 고 천관우 선생의 교열로 개정판을 내었다. 그해 10월에는 <삼성문화문고>판으로도 출판했는데, 비봉출판사(대표 박기봉)에서 이 개정판을 원본으로 삼아 '현대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비봉출판사 간행 '조선상고사'는 2006년 11월10일 초판을 발행했다. 이로써 현대 한국인이 조선상고사의 깊은 진실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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