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순국 111주년에 이준 열사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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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순국 111주년에 이준 열사를 다시 생각한다
  • 이기항 (사) 이준아카데미 원장
  • 승인 2018.07.1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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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항 (사) 이준아카데미 원장
* 지난 7월 14일 오전(현지시각) 네덜란드 헤이그 시내 이준열사기념관에서 1907년 같은 날 같은 자리(당시 드 용 호텔)에서 순국한 이준열사 순국 111주년 추모식이 열렸다. 

이 날 추모식에서 이기항 (재)이준아카데미 원장은 추모식 자리에서 직접 준비한 추모사 ‘순국 111주년에 이준열사를 다시 생각한다’를 읽으며 조국 독립의 밀알이 된 이준 열사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길 것을 강조했다. 이기항 원장의 이준열사 순국 111주년 추모식 추모사를 옮겨 싣는다. -- 편집자 주

 

‘순국 111주년에 이준열사를 다시 생각한다’

이준열사는 1907년 7월 14일 일요일 저녁 7시 헤이그 시내 바겐슈트라트 124번지 드 용 호텔(현 이준열사기념관)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오늘 열사께서 순국하신지 111주년이 되는 날, 순국현장에서 처음으로 추모식을 거행하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이준 열사께서는 돌아가신 후 56년 간(1907~1963) 헤이그 니유 에이켄 두니엔 묘지에 묻혀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 한국정부가 그 유해를 본국으로 봉환해 그 해 10월 4일 서울운동장(동대문)에서 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국민장을 거행한 후 서울 근교 국립묘지 수유리 산록에 마련한 유택에서 영면하고 계십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큰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1964년에는 서울 장충단공원에 대형 동상을 세웠습니다.

다음은 이준 열사께서 순국한 현지 헤이그에서의 기념사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순국 70주기를 기하여 열사께서 묻혀 계시던 묘적지를 확장 정화하고 본국에서 실어 온 화강암으로 아름다운 묘적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열사님의 흉상을 제막하였습니다.

한편 1991년 순국 현지에서 처음으로 헤이그 시내 유서 깊은 클로스터 교회당에서 추모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때 본국에서는 열사님이 출석하셨던 서울 상동교회 이동학 담임목사 인솔 하에 20여명과 본국 이준열사기념회 이선준 회장단이 이끈 10여명 등 순례단이 함께 참석하여 식을 더욱 빛내 주었습니다.

이후 1993년 사단법인 이준아카데미가 네덜란드에 등록되고 1995년 순국 88년 만에 이준열사기념관이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옛 드 용 호텔에서 개관 되였습니다.

이준열사기념관의 설립목적은 순국선열의 얼이 서려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존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그리고 나라사랑, 평화사랑 정신을 후대에 교육하는 것이 또 다른 목적입니다. (사)이준아카데미는 헤이그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 발굴과 국제적인 학술 포럼을 개최했습니다.

이 학술회를 통해 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만약 이준의 헤이그에서 죽음이 없었다면, 일본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무리 없이 한국을 식민화 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그렇게 되는 것이 동북아 평화를 위하여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준이 만국평화회의 기간 중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 못하고 갑자기 그의 숙소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니, 이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국제적으로는 일본의 부도덕성이 세계에 알려지고 그리고 한국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은 이준의 헤이그에서의 순국사건을 역이용하여 그들의 대한 식민지정책을 점진적 방법 대신 속전속결로 바꾸었다.”

“이준 사망 후 5일 만에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그로부터 5일 만에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에 대한 내정권 마저 박탈하고 또 그로부터 7일 만인 7월 30일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켜버렸다. 이렇게 되니 대한제국은 형해(形骸)만 남게 되고 3년 후 1910년 드디어 우리나라는 치욕스럽게도 일본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준의 헤이그에서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었나?

여기서 저는 이준의 죽음을 “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신 2000년 전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고 이준의 죽음이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의 한 알의 밀알이었다는 사실(史實)을 아래와 같이 설명해 보았습니다.

“이준의 죽음 소식이 동경을 경유하여 국내에 알려지자 서울의 사람들은 땅을 치며 슬퍼했다.” 라고 월탄 박종화 선생님은 어린 시절의 목격담을 그의 자서전에 적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의병(義兵)활동이 더욱 격렬하게 일어나고, 2년 후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르빈 역두에서는 드디어 4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에 의한 을사늑약의 원흉인 동시에 서울주재 조선통감이었던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처단된 것이다. 그리고 국내외적으로 항일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일어났다. 드디어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같은 해 중국 상해 불란서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이 됩니다. 3.1운동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겠는가? ”


40년에 걸친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을 하나의 나무로 비유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1919년의 3.1만세운동을 항일독립운동사의 꽃이라면, 1945년 8.15 해방은 열매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나무의 뿌리는 연대기상으로 1907년 이준의 순국인 것이다 !!...” 라고...

끝으로, 이준열사기념관에 관한 잊지 못할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기념사를 마치겠습니다.

개관이후 지난 23년간 저희들은 매일 이 집을 지키면서 국내외로부터 찾아오는 많은 순례객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들 중 어떤 분은 열사님 흉상 앞에 묵념을 올린 후 손수건을 꺼내들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읊어 보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집에 와서 울고 갔습니다.
한국인들은 슬퍼서 울고,
북한 사람들은 속으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은
이곳에 와서 어두운 그들의 과거사를 뉘우치며
사죄의 눈물을 흘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날 만은
세상의 참(眞理)을 생각했습니다.
정의(正義)는 무엇이고,
평화(平和)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나라는 얼마나 소중한가를
깊이 깨닫고 갔습니다.

민족의 수난기를 살았던 한 한국인의 참 삶과
큰 죽음을 보고 느낀 많은 이들의 감동들이
아직도 이 집에 와 보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까지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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