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의사 의거 90주년, 타이중 현장에 세워진 고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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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하 의사 의거 90주년, 타이중 현장에 세워진 고시패
  • 서정필 기자
  • 승인 2018.05.3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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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부터 14일까지 학술대회, 기념식, 고시패 제막식 차례로 진행

▲ 5월 14일 오전 조명하 의사 의거 현장에서는 의거 90주년을 기념해 고시패 제막식이 열렸다. (사진 김상호 슈핑과기대 교수)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55분, 24살의 한국 청년 조명하는 지금의 대만 타이중시 중구 자유로 2단2호(현 합작금고) 앞 커브길에서 당시 무개차를 타고 타이중 기차역으로 향하던 일본의 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며 육군대장 구니노미아 구니히코를 기다렸다가 척살했다.

그는 같은 해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했지만 국가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자신을 던진 정신은 계속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의거 90주년을 맞이해 5월 12일부터 의거일인 14일까지 차례로 ‘학술대회’, ‘기념식’, ‘고시패 제막식’이 연일 이어졌다.
 
▲ 5월 12일 오전 대만사범대 문과대에서는 조명하의사 의거 90주년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사진 김상호 슈핑과기대 교수)

우선 12일에는 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대표 양창수)와 국립대만사범대가 공동주최하고 (사)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회장 남기형), 중화민국한인회(회장 임병옥)와 (주)바움커뮤니케이션이 후원한 ‘조명하의사 의거 90주년 국제학술회의’가 대만사범대 문과대에서 열렸다.

개회 행사에서는 천츄란 국립대만사범대 문과대학장, 남기형 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장, 양창수 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 대표, 호주에서 온 조의사 장손 조경환 선생의 축사가 이어졌다.

다음으로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의 기조 강연이 있었고 랴오쉬에청 대만사범대 문과대 부학장의 사회 제1세션이 이어졌다.

1세션에서는 천즈하오 대만사범대 대만역사대학원 교수의 ‘1928년 대만 세도가의 ‘조명하사건’에 대한 인식: 일기 자료를 중심으로’와 휘진파 대만 창롱대 대만대학원 교수의 ‘대만일일신보로 본 조명하의 사회적 이미지” 제목의 논물 발표가 있었고, 김상호 슈핑 과기대 교양학부 교수와 대만 중싱대 역사학과 멍샹한 교수의 토론이 있었다.

오후 대만신문화협회 천옌빈 집행장의 사회로 진행된 제2세션에서는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김주용 교수의 ’해방 전 타이완 지역 한인 이주와 정착 -조명하의사의 사례를 중심으로‘와 대만대학 대만문학대학원 장리센 교수의 ‘우리가 조명하를 논할 때 무엇을 논해야 하는가? -린센탕《세계일주》, 타이베이 한국학교 및 21세기 대만, 한국 교류 관찰’ 그리고 김상호 교수의 ‘왜곡된 영웅이야기-조명하의사 타이중의거의 역사적 진실’ 이란 논문이 발표됐다.

다음으로 천즈하오(陳志豪), 김주용, 황메이어(黃美娥) 대만대 대만문학대학원 교수의 토론도 이어졌다.

학술대회 마지막 순서로 김상호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종합좌담회에서는 조경환, 호사카유지, 천옌빈, 황메이어, 박경진(타이베이 한국학교 교장)의 모두 발언이 있었다.

이때 호사카유지 교수가 한국과 대만 학자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번역 혹은 공동연구를 제의했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현재 대만중앙연구원 대만역사연구소와 초보적인 얘기가 오고 간 상황이다.

김상호 슈핑 과기대 교양학부 교수는 이 날 학술회의를 “일부 대만학자와의 이견 차를 확인함과 동시에 아무런 여과 없이 당시 왜곡된 일본 자료를 그대로 사용해왔던 대만역사학계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 5월 13일 오전 타이베이 한국학교에서는 조명하의사 의거 9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 김상호 슈핑과기대 교수)

13일 오전 타이베이 한국학교에서는 조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양창수 타이베이 한국대표부 대표와 남기형 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장, 조경환 유족 대표의 치사가 있었고 이어 원광대 김주용 교수의 “조명하 의거의 현대적 의의”에 대해 강연했다.

양창수 대표는 “조명하 의사 등 애국지사의 희생이 있었기에 당당한 주권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며 “의거 90주년을 맞아 한국과 대만간의 우의를 더욱 강화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 의사의 손자 조경환 선생은 “의사 순국 90주년을 맞이해 40주년 기념행사에 처음 참석했던 당시 13세 소년이 예순을 넘겨 다시 대만을 찾게 됐다”며 “지난해 10월 15일 제 할아버지 조명하 의사의 유일한 혈육이던 제 아버지 조혁래 옹께서 향년 92세로 돌아가셨는데 생전 아버님께서는 항상 추모사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양창수 대표님 같은 분은 없었다고 하시며 항상 대만 교민들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또한 조 선생은 “제 할아버지를 기리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이번 타이중시 고시패 설치를 위해 시 당국과 끊임없이 협의하고 그 결실을 맺은 김상호 교수님께 감사를 전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참가자들은 타이베이 한국학교 교정에 있는 조명하 의사 흉상에 헌화했다.
 
▲ 5월 14일 오전 제막된 고시패 (사진 김상호 슈핑과기대 교수)

5월 14일 오전 9시 55분은 조명하 의사가 의거를 행한 역사적인 날짜와 시각이다. 이 시간에 맞춰 이 날 아침 타이중 의거 현장에는 고시패 제막식이 있었다.

좌로부터 호사카유지 교수, 박기준 부대표, 김동원 신부(뒷줄), 조경환 장손, 남기형 회장, 조영환 사무국장, 천옌빈 집행장(뒷줄 모자 쓴이), 임병옥 회장, 김상호 교수.

제막식에 이어 조경환 유족대표의 헌화와 박기준 부대표의 헌화가 있었고, 김동원 신부 등이 차례 대로 묵념을 하면서 조의사의 넋을 기렸다. 친일 성향이 강한 대만에 우리의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고시패가 세워진 것이다.

물론 일부 대만 역사학자와 전문가들은 일본을 의식한 듯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기념비 설치를 반대했던 일본 관방장관의 발언을 언급하며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하지만 타이중시 린자룽 시장은 “그게 누구건 조명하 의거는 일제 때 대만 타이중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 아닌가! 역사는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라며 고시패가 세워질 수 있도록 결정했다.

이 고시패는 김상호 교수가 강한 집념으로 지난 10여 년간 타이중시 정부와 끈질긴 우여곡절 끝에 이뤄낸 결과다.김 교수는 “이 고시패가 세워지기까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습니다. 언젠가는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이제 저의 다음 목표는 타이베이 조명하 의사 순국지 현장에 고시패를 세우는 일”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제막식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조 의사가 약 5개월간 일했던 부귀원과 의거 후 3일간 심문을 받았던 타이중 경찰국(현, 제1분국), 그리고 27일간 갇혀 계셨던 타이중 구형무소(현, 광명중학교)를 둘러보고 3일 연속 이어졌던 90주년 행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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