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종의 광무개혁과 신식 금융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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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종의 광무개혁과 신식 금융제도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8.05.1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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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과 금본위화폐제도 전환 추진과 일본의 방해공작

 

▲ 이형모 발행인

조선 말기 고종은 두 차례의 근대화를 시도했다. 첫 번째는 1880년대 청나라의 속방화 정책이 강행되는 시기에 진행됐다. 두 번째는 청일전쟁 후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바꾼 뒤, 청이나 일본의 영향력이 감소한 상황에서 진행되어 뚜렷한 성과가 있었다. 8년 정도의 기간 동안 진행된 괄목할만한 개혁성과 때문에 일본은 방해공작을 넘어서 오히려 국권침탈을 서두르게 된다.

 

제2차 근대화 개혁과 신식 금융제도

국가의 산업발전과 자본주의 경제를 실현하는 데는 금융제도가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다. 황국협회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1899년 1월에 민간은행으로 대한천일은행을 발족시키고 황실의 영왕(이은)을 총재로 모셨다. 이 은행이 얼마 전까지 상업은행으로 맥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 은행은 조세 수납을 담당하고 정부 각 기구의 예산을 예치받는 국고은행으로 설립되었다. 황실이 출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영왕을 총재로 모셨던 것이다.

전환국은 1880년대 초에 일찍 발족을 했지만, 불량화폐로서 청전을 없애고 한국의 화폐제도를 신식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시행착오도 여러 번 겪었지만, 어쨌든 1900년경이 되면 아주 전망이 밝은 상태로 궤도를 잡는 수준에까지 올랐다.

한국정부가 1900년경부터 신식화폐로 백동화를 발행하였을 때 그 유통지역이 서울, 경기 일원에 한정되어 인플레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곧 국고은행으로 대한천일은행이 그 유통지역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지로 확대하여 인플레는 곧 잡혔다는 연구가 최근에 이루어졌다. 한국화폐가 부실하다는 얘기는 전쟁 중에 일본 측이 한국의 재정을 탈취할 목적 아래 고의적으로 퍼뜨린 혐의가 아주 짙다.

중앙은행 발족과 금본위화폐 전환 추진

신식화폐제도의 최종적 마무리는 중앙은행 발족이다. 대한천일은행이 궤도를 잡아가던 1903년에 <중앙은행조례>라는 규정집이 완성되어 인쇄‧출판됐다. 금융재정 문제에서는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아 주무책임자 위치에 있던 사람이 이용익이다. 함경도의 광산업자 출신으로 양반신분이 아니었으나, 매우 부지런히 일했던 사람으로, 이 사람이 대한천일은행과 중앙은행 수립 양쪽에 다 주무자로서 활약했다.

근대적 금융제도 수립에 노력하던 한국정부에게 1899년을 전후해서 아주 밝은 서광이 비친다. 1899년에 당시 세계 산업발달을 주도하던 영국이 금본위제도로 전환하면서, 세계 금융이 금본위화폐제도 쪽으로 바뀌는 추세에 접해 대한제국은 대단히 고무적이었다.

고종황제는 1899년 11월부터 신식 지폐제도 시행을 위해 차관 도입 교섭에 들어간다. 이용익을 하야시 공사에게 보내 일화 500만 엔 도입을 교섭하면서, 내자 200만 엔에 외자 500만 엔으로 금과 은을 매입하여 지폐의 태환성을 보장하려는 한국정부의 계획을 알린다. 하야시 공사는 본국 정부에 이것이 한국 경제를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적극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재정이 고갈되었던 것이다.

1901년 한국정부는 프랑스 운남성 신디게이트로부터 관세를 담보로 차관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을 움직여 이를 파기시킨다. 1902년 한국정부가 다시 일본에 교섭했지만 지연 속에 러일전쟁이 일어난다. 고의적 방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종황제가 외부대신을 통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는 한국 상인들이 300만 엔을 거두어 정부에 제공하려고 해도 일본 측이 이를 가로막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하기도 했다.

재정 바닥난 일본이 부유한 한국 재정 침탈

AP통신 기자로 러일전쟁 특별 취재를 위해 일본‧한국‧중국을 오간 토마스 밀라드는 1906년에 <새로운 극동>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러일전쟁 직전 상황에서 보면 국가재정 상태는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전망이 밝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일본은 군비확장으로 국고가 바닥이 난데다 금광이 별로 없는 반면에, 한국에는 좋은 금광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무렵, 일본정부의 재정상태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국가예산 중 수년간 매년 60% 이상을 군사비에 투입해 왔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함대나 무기를 능가하는 수준까지 군비를 확장하다 보니 정작 전쟁할 돈이 없어 미국과 영국에서 차관을 얻어야 했다. 전쟁비용 총액은 17억 4642만 엔, 그 비용이 내채가 6억 엔, 외채 7억 엔으로 조달되었다. 그래도 모자라는 돈은 결국 한국의 재정을 강탈해 충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와 대한제국 몰락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해 10월에 한국정부에 재정고문을 투입한다. 재정고문 투입이 이렇게 일찍 시도된 것은 한국정부의 재원을 노린 특별한 목적 때문이었다. 그 재정고문으로 메가다 츠네타로가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통용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종황제가 외부대신을 시켜서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성 지원요청 편지를 보낸 것이 최근에 확인되었다. “이렇게 남의 나라 재산을 일거에 빼앗아가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나라가 계속 방관하고 있겠는가” 하는 내용으로 항변할 정도로 한국의 상황은 심각했다.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고, 고종황제의 광무개혁과 신식 금융제도 추진은 물거품이 되었다. 고종황제의 나라지키기 근대화 전략도 여기서 멈췄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다.
1906년 2월 일본통감부가 설치된다.
1907년 7월에는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고, 순종이 즉위한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병합조약을 공표한다.
대한제국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한다.
국가 간의 조약은 없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점했다.   

이태진 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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