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재한 조선족 집중조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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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재한 조선족 집중조명 (3)
  • 흑룡강신문
  • 승인 2003.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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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수교10주년 기념 특별기획


리산의 설음에 한맺힌 사람들 (3)

기자 진종호

원래부터 한 많은 민족이여서 그러는지 몰라도 중국조선족들에게는 리산이란 아픔이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도 절실하고 깊었다. 일제치하에 독립투쟁을 위해 혹은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중국으로 떠나온 우리의 선조들에게 남북분단으로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근 반세기동안 갈수 없었던 리산의 아픔이 있었다면 전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돈 때문에 늘어나는 뉴 밀레니엄 리산가족의 출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리산의 아픔을 시사해 주고 있다. 개혁, 개방과 함께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한 중국의 새로운 정책의 혜택으로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중국인들이 속출하는 마당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 불법체류자란 꼬리표를 달고 사랑하는 부모처자와 생리별해야 하는 중국조선족들의 현황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 가? 일언지하에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지만 현재 많은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리산의 아픔을 감수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리산의 설음에 한 맺힌 사람들도 존재하고 있는것만은 엄연한 현실이다.

길림성 장춘시의 김모녀인(51세)은 지금도 밤중이면 악몽에 소스라쳐 깨여나군 한다. 영원히 돌아올수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간 아들이 나타나서 엄마를 부르며 애원하는 모습이 자주 떠오르기 때문이다. 김모녀인은 1999년 7월달에 대학에 다니는 아들 뒤바라지 때문에 사채 6만5천원을 주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공교롭게도 지병인 간염이 도져 두달간이나 병원신세를 지게 되어 돈 벌기는 고사하고 빚만 지게 되었다. 넉달후 한 조선족 관련단체의 도움으로 일거리를 찾아 온가족의 상봉과 아들의 졸업을 꿈꾸며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모았다. 아무리 헐한 일이라고 하지만 환자인 그에게는 힘이 부쳤지만 돈이 아까워 약도 제대로 사먹지도 못하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또다른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2000년 8월, 그렇게도 건강하고 씩씩하던 아들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눈앞이 캄캄해 났다. 금방 귀국하자니 반도 갚지 못한 사채가 걸렸고 남아있자니 아들의 모습이 삼삼해서 안절부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들의 병원비는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하는수없이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량해를 구했더니 평소 부모님 고생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며 도와주던 아들이였기에 자신걱정은 하지 말고 몸건강히 잘 있다가 돌아오라는 부탁만 했다. 하지만 하루빨리 귀국할 일념으로 야근까지 해가며 분망히 보내던 그에게 아들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부고가 올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자유왕래만 가능했어도 평생의 한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녀의 넉두리에 지금도 가슴이 찡 해난다.

료녕성 심양시 교외의 리모씨 부부(58세)는 2000년 8월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왔다. 아니 그놈의 개도 안먹는 돈 때문에, 딸과 외손녀의 장래 때문에 왔다고 함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금지옥엽으로 키우던 외동딸이 있었는데 인물곱고 마음씨 고와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고 그들은 이러한 딸 때문에 힘드는 줄 모르고 일하여 생활수준도 유족한 편이였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모 외자기업에 출근하던 딸이 어느날 사귀는 사람이라고 한국남자를 데리고 왔다.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딸의 나이도 22살밖에 안돼 걱정되는 점이 많았지만 딸이 좋다고 하니 별수 없어 동의 하고 말았다. 그 한국남자는 부침성이 좋고 수완도 좋아 금방 한 집안 식구로 될 수 있었고 그들 부부의 신임을 사게 되었다. 하여 결혼식도 버젓이 차려주고 장사에 돈이 필요하다고 할때도 두말없이 예금통장을 털어서 주었다. 딸이 출산하자 이들 모녀의 호적을 한국에 올려야 하기에 혼인신고를 하고 초청장을 하러 간다고 떠난 사위가 함흥차사가 되버렸다. 여러모로 수소문을 하고 노력을 한 결과 사위라는 자를 찾기는 했지만 한국에 처자가 있는 유부남 이였다. 외손녀가 결국 중국판 라이따한( 베트남 전쟁때 생겨난 한국인 사생아)으로 전락되였다는 기막힌 소식을 접한 리모씨 부부는 자살한다고 울고 부는 딸 때문에 속이 재가 되버렸다. 물론 경솔했던 자신들의 처사에도 화가 났지만 최소한의 책임감과 도덕감도 없는 인간쓰레기의 처사에도 분노했다. 해당부문에 송사도 해보고 여러 단체들도 찾아봤지만 아무런 법적해결을 보지 못한채 외손녀도 어느듯 5살이나 먹었다. 아버지 없는 애라고 기시를 받을 가봐 시골을 떠나 시내로 자리를 옮겼지만 엄청난 생활비를 감당할수 없어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였다. 한국에서 그들 부부는 돈되는 일이라면 어디든지 달려 가면서 악착스레 벌었고 저녁이면 딸과 외손녀가 걱정되여 전화통을 붙들고 살았다. 이제 금방 학교에 입학한 외손녀의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하다면서 쉽게 오갈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리씨부부의 소원은 그토록 간절했다.

흑룡강성 화천현의 리모군(34세)과 탕원현의 김모양(33세)은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커플이다. 3년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간 그들은 섬유회사에서 일하다가 남의 소개로 만나 사귀게 되었다. 둘 다 결혼할 나이라 지난해 량가의 부모님도 없이 친척들과 친구들 몇 명이 하객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에서 초졸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 서운 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고 중국에 계시는 부모님들은 더욱 유감스러워 했다고 한다. 올해 1월 아들이 출생, 장손이 태여났다고 그토록 기뻐하는 부모님과 외손자가 보고 싶어 전화에서 두고두고 외우시던 장모님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는 리모군은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고 싶지만 안해가 제왕절개수술을 거쳐 출산하느라 그동안 모아두었던 예금이 바닥난 상황이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길림성 연길시의 최모씨(48세)는 지난해 초 상용비자로 한국에 왔다.

물론 브로커를 통해 인민페 6만여원을 들여 한국행을 성공한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해봤자 별로 소득이 없고 자식들 학잡비도 대기 어려운 형편에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 효자로 소문난 그였기에 년로한 부모님을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1남4녀의 막내인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라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그러나 로씨야로 장사를 떠난 안해가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리혼한 형편에 혼자서 부모님을 모시고 두 아이의 뒤바라지를 하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진퇴량난에 빠진 그는 부모님께 용서를 빌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한국행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남들이 다 가는 술집이나 노래방 한번 다녀 보지 못하고 "짠돌"이란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열심히 돈을 모았다. 돈을 벌어 하루빨리 부모님 잘 모시고 자식들 잘 키우며 살고 싶은 소원이 간절했던 그는 건축현장에서 남들이 위험하다고 기피하는 외부페인트작업까지 도맡아 하면서 피땀으로 번 돈을 허비할수 없었다. "로인들 생사는 밤새 안녕"이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무심한 탓인지 정정하던 부모님이 두달사이로 모두 세상을 떠나버렸다. 하지만 불같은 그의 성미를 잘 아는 누님들은 다 때려치우고 귀국할가 두려워 초상을 다 치르고 난후 뒤늦게야 사실을 알렸다. 요즘 술만 마시면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그를 두고 주위사람들이 더욱 안타까와 하고 있다.

리산의 벽이란 이렇듯 태산처럼 높고 뼈를 깍는 아픔이 동반하는 것 같다. 물론 현시대 리산가족이 전처럼 순수 외부조건에 의해 산생된 것은 아니다. 돈이 원쑤고 가난이 죄여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생겨난 리산가족이지만 어찌하면 평생 한까지는 만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다. 현재 브로커만 살찌우는 페단을 낳고 있는 현상에 착안하여 한국정부가 관련정책을 조금 더 영활하게 수정한다면 리산의 쇠사슬에 얽매여 신음하는 중국조선족들도 적어 질수 있을 것이고 불법체류자를 량산하는 현황도 타개할수 있을 것이란 한국내 동정어린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요즘 한국법무부에서 친척방문의 년령을 대폭 완화하고 본인이 원할 경우 2년까지 체류나 취직이 가능한 정책을 제정했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아마 상기의 비극이 고국땅에서 사라질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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