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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연에서 배우는 삶
이병우 코트라 전문위원/중국 시장경제연구소장  |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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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2  10: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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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우 코트라 전문위원/중국 시장경제연구소장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사무실 책상의 달력을 내년 것으로 교체했다. 다 쓴 달력을 그냥 버릴까 하다가 문득, 한 장씩 넘겨보면서 그 속에 적혀있는 수많은 메모를 읽어보았다. 이런 저런 기록이 꽤 많았다. 이런 걸 흔적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열심히 일을 했다는 증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메모된 내용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요일과 날짜 그리고 시간으로 기록된 그 메모를 기억하며 어딘가를 방문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었을 것이다. 때로는 가족들과 약속한 뭔가도 있었을지 모른다.

열 두 장의 달력을 다 넘겨보니 매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늘 정해진 규칙적인 업무이고, 두 번째는 주로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어쩌면 내년의 달력 메모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다. 책상에서 기본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나면, 그 다음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깨달아 본다. 인간의 하루와 일 년 그리고 평생의 삶은 결국 인간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말이다. 시작과 끝이 사람과의 관계다. 뭔가를 준비해서 만나고, 그냥 우정으로 만나고,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만나고, 동료와 만나고, 고객과 만나고, 여행길에서 낯선 이들과 만나고, 그런 거다.

문제는 이런 사람과의 만남이 대부분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반드시 내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과 슬픔 그리고 고독함의 원천도 인간관계의 불만족에서 시작되고 진행된다. 작성한 보고서, 계획서, 사업전략, 이력서, 제안서, 제품 설명서, 내일의 일정, 이 달의 목표, 아내의 생일 계획, 여름휴가 계획이 생각만큼 잘 진행이 안 된 것은 분명히 짜증나는 일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보고서와 제안서 그리고 계획서에 큰 하자는 없었다. 그걸 진행하려고 만난 사람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면서 원래 의도와 목적 그리고 야심찬 목표가 변질되고 유실된 건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한 것보다는 상대의 잘못이 더 많고, 상대가 나의 훌륭한 계획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다. 바이어는 내 제품의 진짜 우수함을 모르는 바보였고, 아내는 내 진심을 이해 못하는 동네 아줌마가 된 거다. 상사는 어쩜 그리도 나의 심혈을 기울인 보고서와 제안서를 제대로 검토해 보지도 않고 자기주장만 펴는지, 날밤을 새운 나의 정열은 온데 간 데가 없어졌다. 달력에 메모된 지난 1년의 만남에는 이런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흘러간 일 년의 세월은 아쉽고 후회스럽고 허전하다. 다 넘긴 달력을 휴지통에 던지면서도 개운한 맛이 들지 않는 것은 비록 시간은 지나갔지만 나쁜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지난 성탄절 오후에 모처럼 부안의 채석강을 가 보았다. 도착하고 조금 지나니 어둠이 깃들면서 해변에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여전했다. 언덕 위의 커피숍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수평선 끝자락은 마냥 고요하기만 한데 해변으로 밀고 들어오는 파도는 끊임없이 포효하는 몸짓으로 출렁이며 부서졌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힘찬 파도에서 바다의 생명력이 보였다. 우리는 겨울바다와 눈 덮인 산천초목에서 고요와 쓸쓸함 심지어 잠들어 있는 고독의 이미지를 연상한다. 인간의 원기 왕성한 욕망과 비교해 볼 때 겨울의 우주자연은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럴까? 슬며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생각났다.

인류가 문명을 건설하면서 자연을 정복했다고 한다. 아닐 것이다. 그날 채석강에서 바라본 바다와 힘찬 파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우주자연의 테두리와 질서와 섭리 속에서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인간관계를 하며 살아가는 미미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지난 달력을 한 장씩 넘기면서 빠뜨린 것이 하나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도 있었지만 메모가 안 된 자연과의 만남도 있었던 것이다. 주말이면 조용히 산책했던 들과 야산 그리고 바다와 평야가 있었다. 시골길에서 마주친 들꽃과 돌담에 기대어 열매를 맺고 있던 감나무와 대추나무도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 만났던 자연과 나의 관계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둘의 대화는 조용했고 서로의 교감은 깊고 정은 두터웠다. 오히려 상대는 나를 늘 위로했고 변함없는 삶의 진리마저 내 가슴에 심어주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주 좋은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인간과의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새해가 다가오는 중이다. 신년에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배운 여러 경험을 인간관계에 좀 더 접목해볼까 한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다시 가을과 겨울이 오는 우주 질서의 순환을 생각하며 먼저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제안서와 계획서를 작성하기 전에 생각해 보려 한다. 힘없이 물러나 원망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순종해보는 거다. 그러나 묵묵히 자신을 갈고 닦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도 해 본다. 한 번도 사람을 배신한 적이 없는 음양과 오행의 질서를 보고 배우자는 의미다.

그래서 신년 달력에는 사람과의 약속 못지않게 자연과의 만남도 많이 메모를 하려고 한다. 부디 새해에는 건강과 행복이 하늘의 이치에 따라 순조롭게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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