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새로운 한중(韓中) 관계의 생성(生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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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새로운 한중(韓中) 관계의 생성(生成)
  • 이병우 중국시장경제연구소장
  • 승인 2017.11.2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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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판에서 바둑판으로, 장기적인 안목으로 방향과 전략 점검할 때

 

▲ 이병우 중국시장경제연구소장

20세기 서양의 중국학 연구의 한 흐름을 주도한 중국철학의 권위자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은 “중국인은 쌍방을 서로 보충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양인들은 둘의 충돌을 강요한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중국인들은 음양(陰陽)의 대립과 상호 보충을 존재와 변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지의 기(氣)는 합하여 하나가 되고, 나뉘어 음양이 되며, 흩어져 사시(四時)가 되고, 줄지어 오행(五行)이 된다고 믿었다. 여기서 “음양의 상호 작용은 섞이던 이어지던, 그것은 충돌이 아니다. 감합(感合)이고 상호 흡인(吸引)이며 어울림(配合)이다” (마르셀 그라네 - 중국 사유)

 

충돌하여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철학의 우주관은 끊임없는 생성(生成)을 강조한다. 자극하면 변화(變化)가 생기고, 변화가 생기면 통창(通暢)하게 되며, 통창하면 장구(長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주역(周易)의 도리(道理)다. 5천년 중국의 역사가 흘러오면서 중국인들이 사유(思惟)한 음양의 상호 흡인과 어울림은 변한 적이 없다. 어쩌면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혁명도 이런 전통적인 유전자가 동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중국은 지금도 그것을 중국식 특색 사회주의라고 한다. 중국의 오랜 문명과 전통적인 사유에 근거를 둔 사회주의는 단순히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을 답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도(道)라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어떤 이름이 개념화 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무엇을 정의 내린다는 것은 개념화 하는 것이고 구분하는 일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원론적인 사고보다는 조화(調和)와 합리(合理)를 우선한다. 대립과 충돌은 동양의 사유가 아니다. 상호 보충의 사유(思惟)가 맞는 말이다. 음양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충의 개념이다. 사회주의를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특정 이념으로 개념화 했다면 오늘 날 중국식 특색 사회주의의 출현이 가능했을까?

세상은 이렇게 음과 양이 서로 대립하고 보충하면서 생성한다고 중국인들은 믿어 왔다. 손발이 차면 우리 몸에 음이 강한 것이고 열이 많으면 양이 강한 것이다. 중의학(中醫學)의 기본은 음양의 균형이다. 아프면 침을 맞고 약초를 다려 마신다. 이것은 특별한 효능을 기대하거나 즉각적인 회복을 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단지 음과 양의 균형을 잡아주는 일이다. 몸은 음양의 균형이 깨지면 아프고 병이 나는 법이다. 음이 강하면 양을 보충해 주고 양이 강하면 음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삼국지를 대충 보면 중국인들의 권모술수에 혀를 찬다. 그러나 깊은 내공을 갖고 차분하게 읽어보면 중국인의 전통적인 사유(思惟)를 볼 수 있다.

열세에 놓인 유비가 손권을 찾아가고, 수세에 몰린 손권은 조조를 찾아간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풍전등화 앞에서 손권은 다시 제갈량에게 오와 촉의 동맹을 애걸하는 사신을 보낸다. 원리는 간단하다. 균형이 무너지면 내가 망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19차 당 대회를 마치면서 한국과의 기나긴 사드 갈등을 풀었다. 소위 3불 약속으로 치욕적인 외교를 했다는 비난도 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힘의 논리는 생존이 자존심보다 앞선다. 손권이 자존심이 없어서 조비에게 굴욕적인 서신을 보낸 것이 아니다. 당장 밀고 들어오는 유비의 60만 대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시진핑 주석의 1인 권력이 한층 강화되었다고 하고, 일부에서는 중국의 사회주의 노선이 마오(모택동)의 시절로 회귀하고 있다는 말도 한다. 한 마디로 하수(下手)들의 진단이다. 13억 인구의 지도자가 한낱 정권을 연장하려고 자기의 권력을 만들었다면 그는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다. 지난 5년간 수많은 피바람을 일으키며 고질적인 부정과 부패의 사슬을 끊으려 했던 그의 ‘중국 몽(夢)’이 개인의 권력 강화라고 생각한다면 중국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최소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만만한 하수(下手)들이 아니다. 중앙의 핵심 리더가 되기 위한 여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련과 내공을 필요로 한다.

시진핑 주석의 신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의 주창은 이제 중국이 다시 출발하자는 의미이며 인민들을 자극하자는 의도인 동시에 그 자극이 준 변화를 통해서 통창(通暢)하자는 뜻일 수도 있다. 중국의 장구한 번영과 미국을 추월하고자 하는 진정한 ‘중국 몽(夢)’의 실현을 위해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한국과의 사드 봉합도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아닌 듯하여’ 풀어진 것이 아니다. 음과 양은 충돌 할 수 있지만 최종의 목적은 보충이고 균형에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한미일 3국의 힘을 중국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균형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한중 수교 이후의 30여 년 동안 우여곡절을 만들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다시 새로운 한중 관계를 생성해야 한다. 중국은 더 이상 도광양회(韜光養晦)의 단계가 아니다. 신형(新型) 대국관계(大國關係)를 외치며 최소한 아시아에서의 맹주 자리를 미국에 넘길 마음이 전혀 없다. 그래서 장차 우리의 방향이 중요하고 전략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중국을 알아야 한다. 더욱 더 장기적인 안목과 명민한 외교력이 중요한 시점이다. 상대가 지금부터는 장기판을 거두고 바둑으로 승부를 겨루자고 하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장기판만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둑판과 장기판은 차원이 다르다.

중국의 신시대 특색사회주의에 맞서려면 우리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대 중국 수출이 증가하고 요우커(중국 관광객)들이 다시 한국을 찾아오는 것이 ‘고민의 종착역’은 아니다. 판을 새로 깔았으면 그에 걸맞은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운명과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에 우리의 고민은 더 깊고, 더 전략적이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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