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02년 유엔 건물 총격사건 스티브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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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002년 유엔 건물 총격사건 스티브 김씨
  • 미주한국일보
  • 승인 2004.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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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국
입력시간 : 2004-07-16

<시카고=박웅진 기자 designtimesp=9787> “후회는 없습니다” 시카고 사회적응센터로 옮겨

“전 동포들을 위해 아무것도 한일이 없는데도 저와 저의 가족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뉴욕과 시카고 동포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북한 인권 상황을 규탄하며 유엔 구내에서 총기 발사 후 체포돼 복역 중이다 출소, 9월18일 형기 만료시까지 시카고 구세군 자유센터 Half Way House에 머물게 되는 스티브 김씨를 14일 만났다.

김씨는 짧지 않은 기간 자유가 제한되고 사회와 격리된 곳에서 지내야 했음에도 비교적 밝은 표정에 건강해 보였다. 본인의 범행 동기가 한반도 통일을 촉구하고 순수한 민족애 정신에서 우러나왔음을 법정에서도 이미 인정받은 때문인지 과거를 회상하는 김씨의 표정에는 미소와 함께 자부심마저 흘러 나왔다.

“20만~30만명의 북한 난민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저는 유엔이 이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무력을 제외한 어떠한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의견만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전 제가 한일에 후회는 없습니다.”

국민과 정부의 이목을 끄는데 꼭 총기 사용이라는 극단 적인 방법 밖에는 없었을까? “전 고위 관리도 아니고 유력 언론인도 아닌 평범한 시민에 불과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총을 쏘는 일밖에 없었죠. 그런 수단을 쓰지 않는다면 세간에서 저 같은 일반 시민의 목소리에 관심이나 가져 주겠습니까? 전 이번 일을 위해 2년 동안 사전준비와 치밀한 계획을 세웠지요.”

김씨의 범행 동기가 이미 TV와 신문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기 때문인지 TV 시청이 허용되는 교도소에서 김씨는 수감자들로부터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치러냈다’는 찬사를 들으며 성 앞에 ‘Mr.’가 따라 붙는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고.

김씨에겐 그러나 수감돼 있는 동안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은 늘 가슴 한구석을 죄어오는 아픔이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아내, 자식들과 가끔 통화를 했습니다. 지금 현재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아내는 몸이 아픈데다 의료 보험도 없어요. 제가 돈을 벌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사
는 것도 엉망이겠지요. 아내가 한번은 ‘왜 자신의 생각만 했지 가족들 생각은 하지 못했느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할말이 없더군요.”

김씨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장인과 장모도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 대목에서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제 9월 18일 해프 웨이 하우스에서 나갈 때 가지 일자리도 구하고 사회 적응 준비도 어느 정도 마쳐야 한다.

“지금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한 네 가지 품목에 대해 특허를 신청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할 예정입니다.”
김씨는 “교도소에서 전기 기술자들을 따라다니며 일도 배웠고 TV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도 웬만큼 알기 때문에 다시 사회로 나가는 것이 그리 두렵지는 않다”며 “앞으로는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한 가족들을 위해, 또 나아가서는 어려움 속에서 힘과 용기를 심어준 동포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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