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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수 양제의 살수(薩水) 전쟁준비
이형모 발행인  |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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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25  12: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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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수 양제의 망설임

고구려와 수 양제의 전쟁은 1,400년 전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전쟁으로 인하여 피차 화합할 여지가 없어진 처지에서 서로 매년 창칼로 싸웠는데, 거기다가 또 북방 고구려의 침략이 있어서 국력이 피폐해져 견딜 수 없었으므로, 양국은 각각 수(隨) 양제에게 사자를 보내어 고구려를 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수 문제가 임유관 전쟁에서 참패해서 고구려를 가볍게 대적하지 못할 줄 알고 거절했다. 수 문제가 죽고 수 양제가 즉위한 후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전국이 풍성하고 각지의 창고에는 미곡들이 가득 차서 넘쳤다.

양제는 순유를 좋아하여 지금의 직예성(북경시) 통주에서부터 황하를 횡단하여 지금의 절강성 항주까지 3천 리에 운하를 파서 용주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놀고, 토욕혼‧서돌궐‧돌궐 등 나라들의 조공을 받으면서 하늘 아래에는 오직 수(隨)만이 유일한 강대제국이라고 자랑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방에 고구려가 있어서 조선의 서북지역-지금의 황해‧평안‧함경 3도와 지금의 봉천‧길림‧흑룡강 3성-을 전부 차지하여, 토지는 비록 수나라보다 협소하나 인구가 많고 사졸들이 용감하여 수와 겨루려 하였으니, 일찍이 병마도원수로서 강남의 진을 토평하여 무공을 스스로 자랑하고 허영심과 야심에 가득 찬 수 양제가 어찌 잠시인들 고구려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것이 폭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다만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 양제 전쟁을 결심하다

기원 607년(양제 즉위 후 3년) 양제가 수백 기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유림(산서성 영하)으로 돌궐의 추장 계민을 찾아갔다. 당시 돌궐은 고구려와 당 양쪽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돌궐에 답빙사자를 보낸 것을 양제가 알고 추장 계민을 협박하여 고구려 사자를 불러오게 해서 만났다.

양제의 신하 배구가 말하기를 “고구려 땅이 본래 거의 다 한사군의 땅이었는데 중국이 되찾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문제께서 되찾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는데 폐하께서 이 일을 쉽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부추겼다. 이 말을 들은 양제가 고구려 사자에게 “만일 고구려왕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지 않으면 마땅히 쳐들어갈 것이다.”라고 야유하였다.

배구가 <동번풍속기>란 책 30권을 저술하여 양제에게 올린 가운데, 평양이 몹시 아름답다는 점과 개골산(금강산)의 신령스럽고 빼어남을 그림으로 그리고 말로 설명하여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양제에게 동쪽으로 쳐들어갈 욕심을 더욱 부채질함으로써 이름 없는 수많은 병사들을 끌고 와서 동양 고대 역사상 일찍이 있어보지 못한 큰 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무기 생산과 군량준비를 명령하다

기원 611년 6월,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치겠다는 조서를 내려서 전국의 군사들을 다음해 정월 이내로 탁군(북경시 탁현)으로 모이도록 했다.

유주총관 원홍사를 파견하여 동래(산동성 액현 연대)의 바다 어귀에서 전선 3백 척을 만들게 하고, 4월에는 강남, 회남의 수군 1만 명, 노수 3만 명과 영남의 배찬수(작은 창쓰는 전투병) 3만 명을 징발하여 수군을 보강하고, 5월에는 하남, 회남에서 전차 5만대를 만들어 군복과 무기와 군막을 싣게 하고, 7월에는 강남, 회남의 장정들과 배들을 징발하여 여양창(하남성 준현)과 낙구창(하남성 공현) 등의 군량을 탁군으로 운반하게 했다.

강과 바다에는 배들이 언제나 1천여 리 늘어서 있었고, 육지에는 각지로부터 물자를 운송하는 인부들이 항상 수십만 명이 이어져 있어서, 그들의 떠드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전무후무한 대병력 113만 출병

612년 1월 양제가 탁군에 와서 전군을 지휘했다. 전체 군대 규모는 24군이다. 좌군과 우군을 각각 12군으로 나누고, 각 군 구성은, 기병은 40대로, 1대는 100명으로 하고, 10대가 1단이 되어 전부 4단으로 구성했다. 보병은 80대였는데, 20대가 1단이 되어 또한 4단으로 구성했다. 정규 전투군에 추가해서, 치중병(수레부대)과 산병(예비병)도 또한 각각 4단으로 나누어 보병 사이에 끼우고, 개갑과 기치는 각 단마다 색깔을 달리하여 진격과 퇴각, 멈춤과 행군이 정연했다.

하루에 1군씩 40리마다 한 진영을 이루어 출발했는데, 40일 만에야 전부 떠났다. 각군의 꼬리와 머리가 이어졌고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산하를 울렸고, 기치가 960리에 뻗쳤다. 마지막으로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어영군이 출발했는데 그 뻗친 길이가 80리나 되었다.

전투병이 합계 113만 3천8백 명이었는데, 이를 부르기를 2백만 군사라 했으며, 군량과 군수물자 운송병도 4백만 명이나 됐다. 중국 유사 이래 전무후무한 대병력의 동원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수 양제는 필승을 확신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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