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멕시코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지지대회와 후원금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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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멕시코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지지대회와 후원금 모금
  • 김재기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17.03.0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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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5개 지역, 1930년 3.1절 기념식에서 지지대회와 거금 모금

▲ 김재기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3.1만세운동 10년 후인 1929년 11월 3일에 발생한 광주학생 항일독립운동은 3.1만세운동 이후 최대 독립운동이자 ‘제2의 3.1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국적으로 500개가 넘는 학교와 단체가 참여했으며 중국, 일본, 소련 등의 국가에서도 동조시위가 발생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前 학생의 날)’로 제정했다.

지난해 뉴욕시립대학(CUNY)에 방문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과 쿠바에 거주하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광주학생독립운동 지지에 대한 자료를 찾아 언론에 보도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멕시코에서도 샌프란시스코 소재 대한인국민회 총회와 연대하여 3.1운동 11주년 기념식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대회와 후원금 모금 행사가 개최했다는 것을 찾아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했던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 1929년 12월부터 1930년 5월까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해외에서도 지지받던 시기에 보도 된 내용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1930년 3.1절 기념식으로 모여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대회를 개최한 멕시코의 5개 지역은 수도 멕시코시티와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를 비롯해 오부레곤, 탐피코, 부엘도 등이다. 메리다에서는 110여 명이 참여해 200원을 모금했으며, 멕시코시티에서는 30여 명이 100원, 부엘도에서는 20여 명이 360원, 탐피코에서는 15명이 60원을 모금했다. 모두 200여 명이 700원 규모로 현재가치로 1억 천만 원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다.

▲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했던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

1930년 3월 10일자 신한민보에 의하면 광주학생운동이 멕시코에 전해지자 메리다지방회에서는 “내지(본국)에서 광주학생운동이 폭발하자 이를 응원하기 위해 3.1절에 유진태 회장의 사회로 지지대회를 개최했는데, 어른들과 학생들의 분개한 연설을 들은 후 즉석에서 학생후원금을 모금하였다. 비록 본 지방의 경제가 곤란한 중에도 200원이라는 큰 돈을 모금하였다.”고 보도했다.

탐피코 지방회에서도 2월 9일 특별회의를 개최하고 “우리 어린 동포들이 저 악마(일본)의 옥중에서 떨고 굶주릴 때 따뜻한 국 한 그릇이라도 동포들과 같이 일치행동을 하고자 하나 뱃새가 황새거름 하려면 사복이 부러진다는 말과 같이 더 할 수없는 곤경에 든 멕시코 동포들은 뜻과 마음대로 못함이 유감천만입니다. 그러나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어야 격으로 다만 몇 푼이라도 후원하여 엷은 동정이라도 표할 것 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이 모금행사에 강호영의 딸 2살짜리 아이도 동참해 눈길을 끈다. 신한민보 멕시코 특파원 최창선의 보고에 의하면 “강호영은 부인과 두 살된 어린 딸(오라몬아) 세 식구가 각 10달러를 기부하며, 이 같은 일을 할 수만 있으면 힘껏 하고 싶으나 재정이 허락지 않음으로 마음과 같이 못하노라 하고, 또 자기 딸을 가리키며 저것도 한민족인 이상 내지(조선)에서 고통을 당하는 어린 동무(학생)들을 위하여 동정을 표해야한다”고 했다.

멕시코에 한인들은 1905년에 에네캔 농장으로 계약노동이민을 갔던 1033명의 나라 잃은 디아스포라들이다. 이들 중 300여 명은 1921년 쿠바로 재이주했다. 이들은 뜨거운 에네켄 농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달 동안 번 돈을 모두 기부했다.

이에 보다 체계적인 조사연구를 통해 미주지역 한인디아스포라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할 필요가 있다. 국가보훈처와 외교부, 광복회 등이 나서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지한 멕시코와 쿠바 한인 1세대 디아스포라들을 기억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현지화 된 한인 후손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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