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차 재외동포포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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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차 재외동포포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역사적 의미
  • 김민혜 기자
  • 승인 2017.02.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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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학 알마티 한국문화센터 소장, 모국어와 민족문화 전파 역할 연구
▲ 2월 1일 개최된 제79차 재외동포포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 모국어와 민족문화의 전파자’

재외동포신문이 후원하는 제79차 재외동포포럼이 2월 1일 오후 2시 30분,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다. 김병학 알마티 한국문화센터 소장(전 카자흐스탄 한글학교장)이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 모국어와 민족문화의 전파자’를 주제로 발표했다. 


원동 고려인 극장

김 소장은 먼저 ‘원동 고려인 극장’에 대해 설명하며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초기 문화예술 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1932년 9월부터 1937년 9월까지 운영된 원동 고려인 극장은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고려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창단 당시 공연예술은 언론, 교육기관과 함께 연해주 고려인 문화예술의 삼두마차 중 하나로 꼽혔다. 조선신파숙청단, 김 니꼴라이연주단, 신한촌구락부 연예부, 조선중학 연예부 등의 소인 예술단과 자생 악단들이 활약했다. 

1935년은 유학파들의 귀향과 새로운 인재들의 입단으로 무대예술에 꽃이 핀 시기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 단원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운영된 시기이기도 하다. 단원이 부족해 1인 다역을 맡았고, 월급을 다시 내놓고 가재도구를 무대장치로 사용하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무대를 지킨 1935~1937년 사이에는 고전이라 불리는 ‘동북선’, ‘춘향전’, ‘심청전’, ‘장한몽’ 등이 탄생했다. 역사적 사실들을 담아낸 극이다. 

▲ 제79차 재외동포포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발제자 김병학 알마티 한국문화센터 소장.


강제이주와 극장의 분열

강제이주가 실시되면서 극장도 분열을 겪었다. 원동 고려극장은 단원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나뉘어 이주되면서 2개의 극장으로 나뉘었다. 고려인의 주요 문화·예술과 학술기관이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면서 우즈벡공화국의 극장들은 인적·물적 자원의 어려움을 겪었다. 193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우즈벡공화국 타쉬켄트 조선극장도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으나 순회공연 지역을 확장하는 등 1950년까지 활동을 이어나갔다. 우즈벡공화국에는 호레즘 주립 조선극장이라는 우리말 극장이 자생적으로 생겨났으나 1942년에 타쉬켄트 조선극장으로 통폐합됐다. 


제2차 세계대전과 분열된 극장의 통합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쟁부상자 위문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칼춤, 한산춤 및 우리말·러시아어 전시가요를 공연했다. 1946년부터는 조정구 극장장 시대가 열리며 극장의 체계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조정구 극장장은 단원들의 주거 및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타쉬켄트 조선극장 배우들과 북한파견 노무자들을 중심으로 사할린 조선극장이 운영되기도 했다. ‘홍길동’ ‘장화와 홍련’ 등이 무대에 오른 이 시기에는 정인묵 등 무대예술 전문가가 등장했으며, 만능 연극인 김해운의 활약이 돋보이기도 했다. 중앙아시아 순회공연을 비롯해 오지와 험지를 오가는 순회공연을 활발히 펼쳤으나 사할린 조선극장 역시 1959년 7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도약의 발판과 번영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은 순회공연지역을 확대하며 극장 지위를 상승시켜 나갔다. 1955년 9월 수도 알마틔에서 시작된 순회공연은 카프카스, 모스크바 공연을 거치며 1964년 1월에는 공화국적 지위를 갖는 조선극장으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1956년 타쉬켄트 극장대학에 조선배우과가 개설돼 1960년에는 첫 졸업생 14명이 입단하며 제2세대 배우들의 시작을 알리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극단 번영의 시기였다. 1960년대 초반, 프로 극작가 한진과 전문연출가 맹동욱이 등장하며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1982년 9월에는 극장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며 모스크바에서 ‘산부처’ ‘지옥의 종소리’ ‘춘향전’ 등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아리랑 가무단은 소련 전역에 알려졌고, 1982년에는 극장 역사를 총정리한 김 이오씨프 저 ‘소비에트 고려극장’이 저술되기도 했다. 


쇠락의 시작

그러나 모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배우들이 줄어들면서 고려인 극단의 쇠락이 시작됐다. 희곡작가는 사실상 2대에서 대가 끊겼고, 배우들의 기량 또한 약해졌다. 모국어 문화 쇠퇴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모국어 가요가 배제되면서 모국어 가수의 공연기회가 축소됐고, 가요 작사자 및 작곡가의 창작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시대적 혼란을 거치며 극단과 가무단은 파산 상태에 빠졌다. 고려인 원로들이 정부에 건물 제공을 요청했고, 1999년에는 알마티 한국교육원 대강당으로 임시 입주하게 됐다. 2003년 가을에 들어서야 새 극장건물에 입주하며 오늘날 고려극장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고려극장은 ‘기억’ ‘나무를 흔들지 마라’ 등의 작품을 올렸다. 


연구의 의의

김병학 소장은 고려인들의 희곡이 풍부한 토속어와 방언, 다채로운 속담과 구어체 관용구, 러시아어를 직역한 각종 모조어들을 포함하고 있어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김 소장은 “모국어 연극과 노래 전파를 통해 고려인들이 민족성을 지키고 모국어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2017년은 고려인 이주 80주년, 고려 극장 창설 85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고려 극장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 (왼쪽부터) 재외동포포럼 제5대 조롱제 이사장, 제4대 조남철 이사장.
▲ 취임 인사말을 전하는 재외동포포럼 제5대 조롱제 신임 이사장.

한편, 제79회 포럼 진행에 앞서 재외동포포럼 이사장 이·취임식이 거행돼 제4대 조남철 이사장이 제5대 조롱제 이사장에게 바톤을 넘겼다. 조롱제 신임 이사장은 “중책을 맡게 돼 영광스럽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많은 조언 부탁드린다”며 “재외동포신문, 재외동포연구원과의 협력으로 재외동포포럼이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재외동포들은 물론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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