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백제의 동서전쟁(同婿전쟁)
기원 600년에 백제왕으로 즉위한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둘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왕자다. 무왕은 즉위 3년에 신라와 전쟁을 개시했다.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운봉)을 치고, 신라는 소타·외석·천산·옹잠(덕유산)에 성책을 쌓아 방어하니, 백제는 좌평(佐平) 해수로 하여금 네 성을 진공하여 신라 장군 건품·무은과 격전을 벌였다.
무왕이 백제의 왕이 되어 정치권력을 잡는 날에 어째서 장인의 왕국 ‘신라’를 밭의 말뚝만치도 보지 않고 날마다 병력으로써 유린하려고 했던가?
신라의 왕위 계승권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 이후 처음에는 박(朴)·석(昔)이 서로 혼인하여 두 성의 아들과 사위만 왕이 될 권리를 가졌다. 신라 건국 3백년 후에 와서 김씨인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이 석씨인 점해니사금(沾解尼師今)의 사위가 되었다가 왕위를 이어받음으로써, 이때부터 왕위 계승권은 박·석·김 삼성이 공유했다.
그렇다면 6백년이 지난 후인 이때에 와서 부여씨(扶餘氏: 서동)가 삼성에 추가하여 네 성간에 왕위를 전하는 형국이 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무엇인가. 백제 무왕의 생각이다.
신라는 아들과 사위들 중에서 연장자가 전 왕의 왕통을 계승했다. 진평왕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으며, 맏딸 선덕(善德)이 있었으나 그는 출가하여 여승(女僧)이 되어 정치에는 관계하지 않았다. 선화는 둘째 딸이지만 선화의 남편 무왕은 맏사위이므로,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무왕의 기대 - 백제와 신라 국왕 겸임
백제 무왕은 진평왕의 맏사위로서 신라의 왕이 될 희망을 가졌을 것이며, 진평왕도 또한 왕위를 무왕에게 전할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으면 박·석·김·부여(扶餘) 네 성간에 왕위를 전하는 형국이 되어 신라와 백제가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양국 인민들이 생각 없이 벌이는 ‘무한 혈전’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부여씨(扶餘氏) 이하에 진(眞)·국(國)·해(解)·연(燕)·목(木)·백(苩)·협(劦) 등 여덟 개의 큰 가문(八大家)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부여씨가 왕권을 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강력한 귀족세력들이 참여하는 고구려의 벌족공화(閥族共和)와 달랐다.
신라는 원래 박·석·김 삼성공화(三姓共和)의 나라였으나, 이때 와서는 김씨 일가가 왕위 상속권을 150년 이상 독점하다시피 된 때이니, 양가의 제왕만 마음이 맞으면 양국의 결혼을 통한 연합이 용이했을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두 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거의 다 이를 반대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반대 의견을 품었던 자는 김용춘(金龍春)이었다.
김용춘의 반대 공작
그렇다면 김용춘은 누구인가. 진평왕의 셋째 딸 문명(文明)의 남편이다. 선화가 백제로 시집가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진평왕의 사랑은 자연히 문명에게로 옮겨졌다. 따라서 선화의 남편인 서동(첫째 사위)보다도, 문명의 남편인 용춘(둘째 사위)을 더 사랑하게 됐다.
신라의 왕위가 서동왕자에게 가지 않으면 자기에게 돌아오게끔 되어 있었으므로, 김용춘은 ‘서동의 왕위 계승’ 저지공작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여 진평왕이 드디어 서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접고 출가한 여승인 장녀 덕만(선덕대왕)을 불러다가 왕태녀(王太女)로 삼고 용춘을 중용했다.
장래 명목상의 왕위는 선덕에게 있을지라도 실권은 용춘에게 있도록 한 것이다. 용춘에게 왕위를 계승할 명의(名義)를 주지 않고 장녀 덕만(德曼)에게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동서전쟁 이후 삼국의 격변
서동도 총명한 인물이니 어찌 이런 수단에 속아 넘어 가겠는가. 그는 백제 왕에 즉위한 후 곧 김용춘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니, 김용춘은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서 대장군을 겸하여 전선에 나아가 피차 악전고투가 거의 해마다 계속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백제 무왕(첫째 사위)과 김용춘(둘째 사위)의 동서전쟁(同婿戰爭)이다.
훗날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기원654년 제29대 태종무열왕이 된다. 신라 역사상 진골로는 첫번째 임금이다. 태종무열왕 7년(기원 660년)에 신라의 침공으로 백제 의자왕은 패망하고, 제30대 문무왕 8년(기원668년)에 고구려도 패망한다. 태종무열왕의 자손은 제36대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127년간 신라의 왕권을 차지했고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