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신문
편집 : 2017.9.22 금 18:14
오피니언
[칼럼] 재벌이 된 대군 부인의 행보세종대왕의 막내 아들 영응대군 부인 이야기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dongponews@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12.27  14:38:3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송 씨는 세종의 며느리로 역사에 등장하여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여섯 왕의 비호를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다 갔다. 그녀의 남편 영응대군은 38세의 세종과 40세의 소헌왕후가 여덟 번째로 낳은 막내아들이다. 송 씨는 대군의 나이 12살 때 부인으로 봉해졌는데, 4년을 살고는 쫓겨났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송 씨를 내치고 새 부인으로 바꾼 것은 순전히 시아버지 세종의 뜻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세종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는다.

세종이 내보낸 며느리, 다시 돌아오다

3년 상을 치른 영응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재가를 얻어 현재의 부인과 이혼하고 전처 송 씨와 재결합하였다. 송 씨를 잊지 못해 몰래 만나 딸 둘을 낳았던 것이다.(단종1년, 1453) ​ 재결합에 성공한 그들은 곧이어 단종의 혼인에 간여하는데, 친정 조카가 왕비로 간택되는 쾌거를 이룬다. 정순왕후 송 씨는 대군 부인 송 씨의 조카이다.

영응대군은 안국방의 저택에다 재물 또한 누거만(累巨萬)이었다. 늦게 낳은 아들을 너무 사랑한 아버지 세종의 유언으로 내탕고의 모든 보물을 받게 된 영응대군은 노비 1만 명을 거느리는 거부가 된 것이다. 그런 영응대군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모든 보물은 송 씨의 것이 되었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세조는 그 부인 송 씨와 조카 딸 길안현주(吉安縣主)를 극진히 보살피고 많은 재물을 내려주었다. 왕의 비호를 받는 송 씨의 권력도 점점 높아졌다. 한번은 대신들을 초청하여 진수성찬을 차렸는데, 보장(寶障)으로 두른 특별한 한 자리에 사위 구수영(具壽永)을 앉혔다. 그리고 궁정 옷을 입힌 여종 수십 명을 좌우로 시립(侍立)하게 하였고, 객으로 온 대신들에게 사위 구수영을 받들도록 했다.(예종 1년, 1469) 이른바 ‘궁정놀이’를 한 것인데, 뒷말이 많았다.

송 씨는 궁궐에 무시로 출입하면서 왕실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송 씨가 진상(進上)한 비(婢)가 대내(大內)에 깔려 있어 궁중의 내밀한 정보까지 밖에서 다 받아볼 수 있었다. 대신들에게 송 씨는 당연히 눈엣가시였고, 그로 인해 왕과 신하들의 논쟁이 잦았다. 어느날 성종 임금은 외출했다 환궁하면서 송 씨 집으로 행차하여 곡식 50석을 하사했는데, 경연에서 이 행차가 문제 되었다.

신하 : 구수영으로 말하면 일개 어린 신하인데,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몸을 가벼이 하여 가서 보십니까?
임금 : 구수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조 때부터 대군의 부인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또 지나다가 들른 것이지 일부러 간 것은 아니다.
신하 : 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잘못입니다. 부인을 보기 위하여 여항(閭巷)으로 행차를 하심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동정(動靜)은 사관(史官)이 반드시 기록을 하니, 이렇게 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임금 : 내가 참으로 실수를 했으니, 앞으로는 마땅히 삼가겠다.

신하들에게 혼이 나고도 송 씨에 대한 성종의 비호는 그치지 않았다. 그런 틈을 타 송 씨는 임금의 뜻에 영합한 대사헌을 움직여 송사가 일어난 재산·전답·노비 등을 가로채기도 했다.(성종 22년, 1491) 왕은 또 송 씨 소유의 암태 목장을 호조에게 사 주라고 명령했다. 호조에서는 “물과 풀이 부족하여 말을 먹이기에 적당치 않은 허허벌판인 땅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라고 하며 사줄 수 없다고 했다.(성종 24년,1493)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 씨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대신들에게 왕은 "어찌 연유가 없겠는가" 라고 했다.

국왕과 거래하며 재산 늘려가

성종이 보위에 오를 때 송 씨는 자신의 저택을 기증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이다. 재물로 왕과 일종의 거래를 한 셈이다. 송 씨를 비호하는 절대 권력은 연산군으로 넘어갔다. 새 왕이 탄생하자 송 씨는 각종 보물과 노리개를 바쳤다. 이에 신하들은 그런 물건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이치에 어긋난 일임을 설파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송 씨는 권력을 이용하여 재물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다시 재투자하여 키우는 방식으로 재물을 관리했다. 즉 국왕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아 통 크게 베풀고 거둬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재물로 절을 창건하여 절 출입이 잦았던 송 씨는 결국 추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동대문에 방(榜)이 붙었는데, “영응대군 부인 송 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도리어 이것을 상언한 신하를 구속하였고, 사관에게 명하여 송 씨에 대한 소문을 기록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의 이 말까지 기록한 조선시대 사관의 기록 정신이 새삼 돋보인다. 70을 바라보는 송 씨에게 그 추문은 어쩌면 지나친 탐욕이 불러온 모함일 수도 있겠다.

왕과 송 씨의 거래는 계속되었다. 송 씨는 양주 석도(石島)의 뽕나무 밭 7결(結)을 바치고, 쌀 80석을 하사받았고(연산군 6년, 1500) 몇 달 후 은을 진상하자 왕은 그 대가(代價)로 면포 1천 1백 필을 하사했다. 송 씨의 행보는 80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중종은 송 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소선(素膳-고기를 먹지 않음)을 행했다. 송 씨가 여섯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재물 때문이었을까.
 

< 저작권자 © 재외동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가장 많이 읽은 기사
1
[기자수첩] 캄보디아 씨엠립교민사회 와해...
2
[경제칼럼] 한국의 반도체 황금시대는 언...
3
제11회 세계한인의 날·세계한인회장대회 ...
4
[기자수첩] 5~60년대 캄보디아 황금시...
5
[경제칼럼] 인공지능(AI)이 공장을 지...
6
중국 선양 '2017 선양 한국인의 날'...
7
함부르크서 추석맞이 무궁화축제와 문화행사
8
쿠웨이트항공 취업 한인 승무원 격려 세미...
9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고려인 80인 ...
10
카자흐스탄서 '세계환단학회' 학술대회 연...
오피니언
[역사산책] 성충의 자결과 백제의 몰락
김유신이 보낸 첩자 '금화'와 백제 좌평(佐平) 임자는 의자왕 주변에서 어떻게 활약했
[법률칼럼] 모계특례 국적취득제도…⑧
2심은 더 나아가, 법무부장관의 반려처분이 신뢰보호의 원칙에도 반한다고 판단하였
[우리말로 깨닫다] 빚과 빌다
책을 읽다가 인도유럽어나 잉카어 등에서 <빚>에 해당하는 단어가 범죄나 잘못과 어원
[경제칼럼] 인공지능(AI)이 공장을 지휘한다
제조업은 서비스업과는 달리 인공지능(AI)에 보수적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제조 공정에
한인회ㆍ단체 소식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03173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30, 711호(내수동, 대우빌딩)  (주)재외동포신문사 The overseas Korean Newspaper Co.,Ltd. | Tel 02-739-5910 | Fax 02-739-5914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서울아00129 | 등록일자: 2005.11.11 | 발행인: 이형모 | 편집인: 이명순  | 청소년보호책임자: 이명순 
Copyright 2011 재외동포신문. The Korean Dongponew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ongpo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