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재벌이 된 대군 부인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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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재벌이 된 대군 부인의 행보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승인 2016.12.2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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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막내 아들 영응대군 부인 이야기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송 씨는 세종의 며느리로 역사에 등장하여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여섯 왕의 비호를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다 갔다. 그녀의 남편 영응대군은 38세의 세종과 40세의 소헌왕후가 여덟 번째로 낳은 막내아들이다. 송 씨는 대군의 나이 12살 때 부인으로 봉해졌는데, 4년을 살고는 쫓겨났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송 씨를 내치고 새 부인으로 바꾼 것은 순전히 시아버지 세종의 뜻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세종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는다.

세종이 내보낸 며느리, 다시 돌아오다

3년 상을 치른 영응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재가를 얻어 현재의 부인과 이혼하고 전처 송 씨와 재결합하였다. 송 씨를 잊지 못해 몰래 만나 딸 둘을 낳았던 것이다.(단종1년, 1453) ​ 재결합에 성공한 그들은 곧이어 단종의 혼인에 간여하는데, 친정 조카가 왕비로 간택되는 쾌거를 이룬다. 정순왕후 송 씨는 대군 부인 송 씨의 조카이다.

영응대군은 안국방의 저택에다 재물 또한 누거만(累巨萬)이었다. 늦게 낳은 아들을 너무 사랑한 아버지 세종의 유언으로 내탕고의 모든 보물을 받게 된 영응대군은 노비 1만 명을 거느리는 거부가 된 것이다. 그런 영응대군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모든 보물은 송 씨의 것이 되었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세조는 그 부인 송 씨와 조카 딸 길안현주(吉安縣主)를 극진히 보살피고 많은 재물을 내려주었다. 왕의 비호를 받는 송 씨의 권력도 점점 높아졌다. 한번은 대신들을 초청하여 진수성찬을 차렸는데, 보장(寶障)으로 두른 특별한 한 자리에 사위 구수영(具壽永)을 앉혔다. 그리고 궁정 옷을 입힌 여종 수십 명을 좌우로 시립(侍立)하게 하였고, 객으로 온 대신들에게 사위 구수영을 받들도록 했다.(예종 1년, 1469) 이른바 ‘궁정놀이’를 한 것인데, 뒷말이 많았다.

송 씨는 궁궐에 무시로 출입하면서 왕실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송 씨가 진상(進上)한 비(婢)가 대내(大內)에 깔려 있어 궁중의 내밀한 정보까지 밖에서 다 받아볼 수 있었다. 대신들에게 송 씨는 당연히 눈엣가시였고, 그로 인해 왕과 신하들의 논쟁이 잦았다. 어느날 성종 임금은 외출했다 환궁하면서 송 씨 집으로 행차하여 곡식 50석을 하사했는데, 경연에서 이 행차가 문제 되었다.

신하 : 구수영으로 말하면 일개 어린 신하인데,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몸을 가벼이 하여 가서 보십니까?
임금 : 구수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조 때부터 대군의 부인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또 지나다가 들른 것이지 일부러 간 것은 아니다.
신하 : 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잘못입니다. 부인을 보기 위하여 여항(閭巷)으로 행차를 하심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동정(動靜)은 사관(史官)이 반드시 기록을 하니, 이렇게 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임금 : 내가 참으로 실수를 했으니, 앞으로는 마땅히 삼가겠다.

신하들에게 혼이 나고도 송 씨에 대한 성종의 비호는 그치지 않았다. 그런 틈을 타 송 씨는 임금의 뜻에 영합한 대사헌을 움직여 송사가 일어난 재산·전답·노비 등을 가로채기도 했다.(성종 22년, 1491) 왕은 또 송 씨 소유의 암태 목장을 호조에게 사 주라고 명령했다. 호조에서는 “물과 풀이 부족하여 말을 먹이기에 적당치 않은 허허벌판인 땅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라고 하며 사줄 수 없다고 했다.(성종 24년,1493)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 씨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대신들에게 왕은 "어찌 연유가 없겠는가" 라고 했다.

국왕과 거래하며 재산 늘려가

성종이 보위에 오를 때 송 씨는 자신의 저택을 기증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이다. 재물로 왕과 일종의 거래를 한 셈이다. 송 씨를 비호하는 절대 권력은 연산군으로 넘어갔다. 새 왕이 탄생하자 송 씨는 각종 보물과 노리개를 바쳤다. 이에 신하들은 그런 물건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이치에 어긋난 일임을 설파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송 씨는 권력을 이용하여 재물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다시 재투자하여 키우는 방식으로 재물을 관리했다. 즉 국왕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아 통 크게 베풀고 거둬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재물로 절을 창건하여 절 출입이 잦았던 송 씨는 결국 추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동대문에 방(榜)이 붙었는데, “영응대군 부인 송 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도리어 이것을 상언한 신하를 구속하였고, 사관에게 명하여 송 씨에 대한 소문을 기록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의 이 말까지 기록한 조선시대 사관의 기록 정신이 새삼 돋보인다. 70을 바라보는 송 씨에게 그 추문은 어쩌면 지나친 탐욕이 불러온 모함일 수도 있겠다.

왕과 송 씨의 거래는 계속되었다. 송 씨는 양주 석도(石島)의 뽕나무 밭 7결(結)을 바치고, 쌀 80석을 하사받았고(연산군 6년, 1500) 몇 달 후 은을 진상하자 왕은 그 대가(代價)로 면포 1천 1백 필을 하사했다. 송 씨의 행보는 80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중종은 송 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소선(素膳-고기를 먹지 않음)을 행했다. 송 씨가 여섯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재물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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