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도의 촛불을 밝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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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도의 촛불을 밝히면서
  • 김경웅 (오타와 사랑장로교회 목사)
  • 승인 2016.12.1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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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예루살렘.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나치 전범 재판이 열렸다. 아이히만은 6백만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한 실무 책임자였다. 1945년 독일 패전 후 아르헨티나에서 ‘리카드로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숨어 평범한 삶을 살다가 1960년 5월에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의해 검거돼 예루살렘으로 이송된 것이다.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 과정을 지켜 본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반유대주의적 이념이나 나치즘에 심취,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악의 화신으로 보기보다는 거대한 기계의 한 작은 톱니바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 평범한 관료로 해석하는 글을 썼다.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단순한 명령수행자, 즉 스스로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이나 선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던 평범한 공무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돌프 아이만의 죄는 ‘생각의 무능’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며칠 전 김기춘 전비서실장의 청문회 과정을 보면서, 김 전 실장이 바로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으로 대중이 여겨주길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통령이라는 상위, 최종 권력자의 지시된 사항만을 이행했고 개인적으론 그 대통령의 근처에 사사로이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평범한 관료. 오히려 무기력했을 수도 있었던 명령수행자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추적해 가다보면 아렌트가 발견하지 못했던 반전이 있다. 아이히만이 실제로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였으며, 의도적이고 열성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실천해내 악을 선택한 책임 있는 권력 추구자였다는 점이다. 아이히만의 상관이었던 하인리히 뮐러가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또 아이히만이 사형 집행 전에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 없이,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을 것입니다.”고 한 마지막 말은 개인적으론 공포 영화 주인공의 속삭임처럼 오싹하게 들린다.

개인적인 짧은 생각으로는 악이 구조화되고 사회적인 권력을 가진 지배구조 속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마치 초록의 잔디밭에 어디서 날아온 민들레 씨앗 하나가 꽃을 피우고, 그 꽃이 홀씨가 되어 흩어지고, 그것이 반복해 잔디밭을 덮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과정의 초기에 즉 악이 자라나고 하나의 집단이나 권력으로 사회구조 안에 형성되기 전까지는 개인적 선악의 판단과 결정, 혹은 저항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악이 사회 속에 자리를 잡게 되면, 단순가담자들을 넘어 악의 그늘을 필요해 숨어들어오는 이들이 더 많아지고, 악이 융성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모습의 다른 종류의 악들과 연대를 하기도 한다. 

한국의 현 정치 상황에 대한 내 관심도 이 시간에 있다. 즉, 이전의 정권의 비리들과 현 정권의 질적인 차이는 바로 이 시간과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오랫동안 자라온 한 문제의 열매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가 자라온 잔디밭은 가난과 배고픔의 역사와 집행중심의 개발과 성장에 대한 집착, 그리고 우리를 수렁에서 벗어나게 한 영도자에 대한 부채의식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의 양분으로 공급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단기적 개개인들의 농단을 넘어 구조와 역사 속에서 자라난 열매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이에 맞서는 2016년의 광장의 촛불들은 정치•노동계의 반정부적 그룹이나 80년대 운동권과 같은 이론으로 무장하고, 조직화된 저항이 아니라, 민들레가 자라는 동안 함께 자란 잔디들, 21세기형 시민정신, 의 등장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또 하나는 ‘1234567’로 정리되는 탄핵의 결과물이 주는 아이러니처럼, 역사의 뒤에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악을 비웃고, 악이 왕성해지는 것을 저지해 주는 것 같다. 

멀리서 상황을 보는 나는 여름마다 민들레와 씨름한 경험 때문인가… 민들레처럼 우리 현대사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조직화된 악이 광장의 낭만과 풍자, 그리고 평화라는 약해보이는 손의 힘에 의해 정말로 뽑혀 날까 하는 조바심이 난다. 광장의 촛불은 민들레를 뽑던 그 약한 손에 가시가 박히거나 생채기가 나도, 삶의 뜨거운 땡볕 아래서도 하던 일을 끝까지 해낼 것인가?

나는 허리 숙여 여린 손으로 잡초를 뽑는 그들에게 한 번의 격려와 지지를 표현하는 박수와 환호성으로가 아니라, 나도 허리를 숙이고 잡초를 뽑으며, 손에 생채기와 가시를 나누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 기도이니… 매주 수요일 밤에 기도의 촛불을 밝혀본다. 내 기도는 지리해 보이는 이 민들레 제거 과정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속하는 힘과 인내가 촛불을 든 시린 손들과 가슴과 내 가슴에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기도가 내 민족과 나라를 향한 작은 정치적 책임이자 참여의 실천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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