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위한 다짐, 역도산(力道山)의 주먹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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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위한 다짐, 역도산(力道山)의 주먹다짐
  • 월간 아리랑
  • 승인 2004.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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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구(大田區)의 혼몬지(本門寺) 묘지에서

■ 글·사진 / 김정동(목원대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 E-mail:cdkim@mokwon.ac.kr

어린 시절 우리들의 영웅
나는 어렸을 때 역도산(力道山)은 역도(力道)를 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집에 TV가 없을 때라 소문만 들어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정도였다. 우리 친구들은 그가 스모 선수라 했고, 당수(唐手) 즉, 가라데 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요새야 맘만 먹으면 안방에서도 위성 TV로 일본 스모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스모가 뭔지 도시 알 수 없을 때였다.


지난 정초 도쿄에서 역도산과 관계된 장소 세 군데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침에는 료고쿠(兩國)에 있는 국기관(國技館)에 갔고 오후에는 역도산이 잠들어 있는 오타 구(大田區)의 대본산(大本山), 이케가미(池上) 혼몬지(本門寺)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밤에는 그가 칼에 찔렸던 장소 아카사카(赤坂) 술집 골목을 찾아 들었다. 역도산이 자주 가던 술집 ‘히메(姬)’는 어디에 있었던가.

지금 역도산은 전설 속에 묻혀 있다. 아무도 그를 말하지 않는다. 역사 기록도 이제 잠잠하다. 더구나 지금은 프로 레슬링이 예같이 인기도 없다. TV는 그저 가끔 외국 선수들의 게임을 맥없이 내보낼 뿐이다.


나는 아카사카의 어느 술집에서 20대 초반의 아가씨에게 역도산을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안다고 답했다. 김일(金一)도 안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그들의 경기를 본 바는 없다고 했다. 사실 그렇다. 나도 역도산의 경기를 본 적은 없다. 신문이라든가 어떤 매체를 통해 가끔 들었던 것뿐이었다. 물론 김일의 박치기는 나도 여러 번 보았다. 그들은 우리 어린 마음의 영웅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모든 분야가 축 처져 있을 때 그는 영웅같이 매트 위에 나타났다. 서민들은 길거리의 TV 앞에 모여 그의 시합을 보았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가 한창 명성을 날리고 있을 때 그가 조선인이란 것을 몰랐었다. 그가 조선인이란 것을 알았을 때는 그가 죽음을 앞둘 즈음이었다. 1960년대 초 열광은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일본인으로 귀화한 상태였는데도 그랬다.

복수를 위한 다짐. 주먹다짐
김신락(金信洛, 1924.11.14-1963.12.15)은 1924년 태어났다. 농부 김석태의 셋째 아들이었다. 태어난 곳은 조선 함경남도 홍원군(洪原群) 용원면(龍源面) 신풍리(新豊里)이다. 김신락은 어린 나이에 고향을 잃었다. 그리고 함경도 지방과 만주 간도 지방을 떠돌았다. 그러나 체구는 이미 1미터 80이었다. 14세 때는 어린 나이에 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6세 때인 1939년 5월 단오날의 씨름 경기에서 그는 용력(勇力)을 보이다가 다마노우미 우메키치(玉の海梅吉)의 아버지뻘 되는 오마와리(巡査)에게 끌려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다마노우미 우메키치는 1950년대 일본 제일의 스모 선수였다.


오늘의 일본 스모를 키운 사람들은 조선 출신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떠돈다. 우에다(植田剛彦)는 『재일한국인의 저력』이란 책에서 전후 배출된 24명의 요코즈나 중 4명이 한국계라고 하고 있다. 다마노우미 우메키치도 본래는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김신락은 ‘일본 사람이 되기 싫다. 고향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항거하다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는데 그는 이후 1등 씨름꾼이 되어 복수를 하기로 다짐한다. 1941년부터 ‘리키도산(力道山)’이라는 선수명으로 스모계에 들어갔다.


일본인 모모타(百田) 게이코와 결혼, 모모타 광호(百田光浩)로 개명하고 일본에 귀화한다. 태어난 곳도 나가사키 현(長崎縣) 오무라(大村)라고 했다. 그는 이후 자기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물었었고, 워낙 인기가 있다보니 일본인들은 그가 일본인이란 것을 기정 사실화하려고도 했다.


스모 선수로 이름을 날리며 승승장구하면서도 언론의 차별 대우와 재일 동포들의 불신의 틈바구니에서 고뇌했다. 역도산은 슬럼프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전후 최초의 대 스모 혼바쇼(本場所)는 1945년 11월 16일 도쿄 료고쿠의 국기관에서 열렸다. 1949년 25세 때 세키와케(關脇)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의 스모는 적이 없었다. 그는 스모 밭(俵)의 실질적 황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승단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센진이었다.

미국인을 때려 눕혀
1950년 9월 2일 역도산은 니혼바시(日本橋) 하마 죠(浜町)의 자택에서 극비리 은퇴를 결정했다. 26세 때 한창일 때였다. 스모는 일본의 국기일 뿐이었다.
1951년 10월 28일 메모리얼 홀에서 세계적 프로 레슬링 선수 보비 브란스의 일본 원정을 계기로 레슬링으로 전향하였다. 브란스는 미 점령군 위문을 위해 일본에 왔던 것이다. 국기관은 미군 점령 후 메모리얼 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있었다.


역도산은 1952년 레슬링 수업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LA, 하와이에서 그는 두각을 나타내 여러 선수들을 제압했다. 2백 여회의 출전에 단 5회만 패했을 뿐이다. 그의 큰 몸집과 황소 같은 힘에서 나오는 손의 일격은 최상의 무기였다.
그는 ‘일본의 빛나는 별’이었다. 그의 연전연승 소식은 일본인들을 흥분시켰다. 귀축(鬼畜)의 나라, 미국을 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53년 1월 역도산은 아이안 마이크 마즈루키와 호놀루루 올림픽 오디토리엄에서 한판 붙었다. 역도산이 이겼다. 마즈루키는 그후 프로모터가 되어 역도산을 설득했다. 역도산은 스모 선수에서 프로 레슬링 선수로 전향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미국에서 프로 레슬링의 흥행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프로 레슬링의 흥행을 자신하고 있었다. 돈과 명예가 거기 있다고 생각했다. 줄여서 ‘프로레스’였다.


그는 1년 만에 개선 장군같이 일본에 돌아 왔다. 그의 주도 하에 일본프로레슬링협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역도산은 프로 레슬러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프로 레슬러였던 것이다.
1953년 그는 가두(街頭), 점두(店頭) TV의 프로레스 중계방송의 주역이었다. TV판매에 불을 붙였다. 그는 소화 천황 다음으로 유명해 졌다. 아름다운 JAL 스튜어디스와도 결혼을 한다.


1954년 12월 22일 역도산은 국기관의 일본 프로레스 최초 선수권전에서 일본 유도선수 출신 기무라(木村政彦)에게 이겨 최고의 절정기를 맞는다. 강인한 체력과 당수(가라데)의 특기로써 강적들을 제압했다. 1958년 8월 LA에서는 세계선수권자인 J. S. 루 테스를 물리치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일본인의 미국 방문이 어려울 때 미국을 누볐던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막대한 재산을 모아 일본 굴지의 부호가 되어 많은 체육관과 흥행장을 설립하였다. 1959년 10월 29일 또 한사람의 재일 동포 야구선수 장본훈(張本勳)이 프로 야구계의 신인왕이 되어 설움 속에 신음하는 조선인들에게 위로를 준다.


1962년 초 도쿄는 인구 1천만을 돌파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올림픽을 향해 도약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역도산은 그 즈음 『역도산 자전, 공수(空手) 촙 세계를 가다』(1962)를 낸다.
역도산은 1963년 1월 우리 문교부장관 초청으로 처음 방한한다. 그는 이때 모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을 약속한다. 레슬링은 미국, 일본 그리고 뒤늦게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역도산 묘는 이장되어야
그러나 일본인들의 집요한 내리기 공세는 계속됐다. ‘재팬 드림’이나 꿈꾸라고-. 역도산은 1963년 12월 8일 10시 40분, 아카사카 산노시타의 나이트클럽 뉴라틴쿼터에서 일본 야쿠샤 스미요시 일파의 무라타카츠시의 칼에 찔린다. 그리고 산노병원으로 옮겨졌다. 산노병원은 산부인과 병원이었다. 나흘 후인 12월 15일 역도산은 약관 40세의 나이로 죽었다. 병명도 하찮은 복막염이었다.


어려운 시절 그는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영광의 월계관 대신 칼의 세례를 받고 허망하게 인생을 마친 것이다.
그가 죽은 뒤 일본 도처가 그와 인연을 맺는다. 그의 시신은 나가사키 현 오무라 시에 모셔졌다. 그의 일본적이 그곳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 혼몬지에도 묘지가 있다. 혼몬지는 도큐(東急) 이케우에 선 이케우에 역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있다. 7만 평 부지의 넓은 절이다. 혼몬지는 가마쿠라 시대에 건립된 전통 있는 절인데 니치렌 종(日蓮宗)이다.
절 묘역에는 우리와 악연이 많은 자들이 줄줄이 누워 있었다. 임진왜란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공양탑(69번)을 비롯해 임오군란 때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 변리 공사의 묘소(47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주모자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1852-1912)(50번), 통감부시대 재정고문으로 조선의 재정을 요리했던 메가타 쇼타로(目賀田種太郞, 1853-1926) 남작(28번) 그리고 일제시대 조선의 경제를 수탈하던 노구치 시타가우(野口 遵, 1873-1944)(24번) 조선수력발전소 사장 등이 그들이다. 그들 뒤쪽에 역도산(63번)이 잠들고 있는 것이다.


역도산의 묘소를 가려면 그들을 지나쳐 가야만 되는 것이다. 자리를 잡아도 너무 잘못 잡은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속히 어디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해야 되는 것이다.
혼몬지 입구에는 싱가포르 창이(Changi, 樟宜) 순난자 위령비가 있는데 이 비는 B급 전범으로 낙인찍힌 조선인 조문상(趙文相) 등 14명의 안타까운 죽음을 담고 있다. 조문상은 필자의 숙모님과 가까운 친척이 되는데 경성광전 광산과를 다닌 장래가 촉망되는 광학도였다. 영어를 잘해 싱가포르에 끌려갔고 군속이 되어 포로 감시원으로 있다가 일본 패전 때 연합군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1947년 2월 25일 억울하게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유도 없이 이역 땅의 이곳 위령비 속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연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역도산 묘 앞에는 동상도 세워져 있다. 늠름한 그 모습은 지금도 일본을 호령하고 있는 듯 하다. 또한 그 묘지 본당 뒤에는 먼지가 뒤덮인 그의 목상이 하나 있다. 그의 동상은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시 광명사에도 있다.

북한에서의 영웅
그에 대한 한국인의 존경심은 그의 사후에도 식지 않았다. 그가 태어난 북한은 특히 더 했다. ‘민족을 빛낸 애국자’라고 공칭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제자로는 박치기로 유명했던 김일이 있고 일본인으로는 안토니오 이노키(猪木), 자이언트 바바가 있다. 이들 3인을 역도산 제자 삼총사라고 한다. 김일은 1957년부터 그 제자가 된다. 이노키는 일본의 참의원을 하기도 했다.


역도산은 일본에 가기 전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중 한 번 고향을 찾는데 그때 부인과의 사이에 난 딸이 김영숙(62세)이다. 그녀는 평양체육대학을 졸업하고 북한 평양에 살고 있는데, 1990년대 북한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이었던 박명철이 남편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기도 한 그는 김영숙과 대학 동창이다. 1990년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 북측 선수단장을 맡아 한필화와 한필성 남매의 상봉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노키가 1994년 9월 북한에서 김영숙을 만난 일도 있다.


김영숙은 1961년 일본에 건너 가 아버지 김신락과 만난다. ‘어머니가 싸준 찹쌀과 고향의 산나물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때 딸은 아버지 앞에서 ‘내고향’이란 노래를 부른다.
김신락의 외손녀가 되는 박혜선은 북한 국가 대표급 역도 선수이다.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때 출전한 바 있다.
김일성은 1993년 1월 20일 김영숙을 주석궁으로 불러 당신의 아버지는 ‘조선의 영웅’이라고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어, ‘역도산이 조선 사람이면서 일본 선수라는 욕된 운명을 진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가 빚어낸 후과’라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그의 전기와 비디오가 판매되고 있다. 1995년에는 역도산을 주제로 하는 우표도 만들었다.
2001년 봄 북한 조선영화예술촬영소는 영화 ‘역도산’을 촬영했다.
일본에서 결혼한 모모타와의 사이에는 2남 2녀를 두고 있다. 그의 2남 미쓰오(光雄)도 후에 프로 레슬러로 대를 이었다.
한국인 프로 레슬러 역도산의 존재는 지금도 우리 눈앞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역도산은 아마 우리 윗세대들의 살아있는 영웅이었는지도 모른다. 살기 어려운 시절 그의 주먹은 그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서민들은 그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우리 한국인보다 오히려 일본인들의 영웅이었다.

[근대사현장]

[현해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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