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의료 전문지 한의신보(韓醫新報) 발행인 아카기 하지메
상태바
재일교포 의료 전문지 한의신보(韓醫新報) 발행인 아카기 하지메
  • 월간 아리랑
  • 승인 2003.02.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의신보(韓醫新報) 발행인 아카기 하지메  

이런 신문 보셨나요?  
신문이나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안다. 왜 이렇게 피말리는 일을 하는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죽어라고 싫어하면서 자신과의 약속, 독자와의 보이지 않는 약속을 위하여 미련하게 교정지와 씨름하는 사람들이 바로 출판업계 사람들이다.

아카기 하지메(62)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16년 전인 1987년 5월에 그의 고생길은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재일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 잡지사에 근무했었다. 그때 한국에서 손님이 찾아와 안내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문태준(전 보사부 장관, 대한의사협회 명예회장)씨 였다. 한국은 1988년에 국민의료보험 실시를 앞두고 먼저 국민의료보험을 실시한 일본을 모델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던 차였다. 그때 문태준 선생과 함께 일본 후생성과 의료계 및 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의료 제도에 대해 자료를 모았다. 그러던 차에 문태준 선생이 "일본에 재일동포 의사는 몇 명이나 되나?"라고 질문했다.

  그 후 아카기 씨가 후생성에 자료를 토대로 약 5,000여 명의 재일동포 의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5,000명의 의사를 배출할 정도로 의료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일 한국인,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단체나 모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나 경제나 연예 오락 정보를 다루는 신문 잡지는 많지만 정작 의료계를 결집하는 신문하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시작한 일이 바로 한의신보의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일본 의료계는 한국의 의료 수준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비록 의료제도는 일본이 앞질렀지만 의사 개개인의 의료수준이나 의학 지식이 차이는 없다고 그는 판단한다. 일본 의료계에서 있었던 일은 한국에 다시 재현되듯이 국민의료보험을 시작으로 의학분업도 그렇고, 최근 의료 사고 문제도 그렇다.


  아카기 씨는 상호간에 이와 같은 견해의 차를 줄이고자 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자리도 마련해 왔다. 그래서 한일간의 의사들간의 교류와 학술 세미나가 활발해진 결과를 낳았다.
특히 1988년 이후는 한일 대학병원끼리의 교류가 크게 들어 오사카시립 대학병원과 고려대학교와의 교류를 시작으로 각 대학으로 확대되었고 동경대학교와 서울대학교와도 협정을 맺어 2년에 한번씩 학술 교류를 갖게 되었다. 한일간에 합동으로 연구할 과제는 얼마든지 있다. 같은 동양인의 체질이기 때문에 구미의 기술로 적용하면 알레르기, 신경정신병, 난치병 등 풀리지 않는 숙제도 많기 때문이다.

  한의신보의 발행부수는 6000부, 월1회 발행으로 현재 146호(2003년 1월호 기준)에 달한다. 그것도 아카기 씨 혼자서 취재에서 교정, 영업, 홍보까지 다 처리해나간다. 한의신보에 편집구성을 보면 1면 한일교류 기사, 2면 한국 기사 3면 한일, 일한 우호 기사, 4면 재일동포 의사 소개 기사 5면, 한국 기사 6면 재일동포 의사의 근황, 일본 뉴스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4면에 재일동포 의사 소개와 6면에 재일동포 의사의 근황에 반드시 한국 본명을 기재한다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일본 사회에서 병원 이름부터 전화번호 게재까지 한국 이름을 쓰는 의사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 사람들이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재일한국인이라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회. 그래야 뒤를 잇는 젊은 의학도들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직접 취재를 한 재일동포 의사만도 전국 방방곡곡에 300명이 넘는다. 반겨주면서 좋은 일 한다고 격려해 준 의사가 있는 반면 끝내 이름 밝히기를 거절한 의사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씁쓸한 기억은 처음부터 본명으로 활동한 재일 동포 의사가 어느날 병원 이전을 해서 찾아가 보았더니 간판도 일본명으로 개원해 있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카기 씨! 나의 심정도 좀 이해해 주세요. 오죽하면 그랬겠소?" 라고 하소연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경과 달리 지방일수록 노인들이 주고객인데 손님이 찾지 않으면 병원 유지가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재일 의사들의 의지의 문제인지 아니면 일본인들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의 결과인지 아직도 판단이 잘 안 선다고 덧붙였다.


  작년 연말에 모 신문사 주최로 지역사회에 공헌한 50인의 의사를 선발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에게 재일동포 의사 중에 3명을 추천해 달라고 의뢰해 왔다. 기쁜 마음으로 3명을 추천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선발되었다고 알려왔다. 그런데 막상 팜플렛 지면에는 일본이름으로 발표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신문사에 항의했더니 본인의 간곡한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일본 이름으로 수록했다고 전해졌다. 그는 슬그머니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취재를 가면 재일동포 의사들이 "왜 일본인이 이런 일을 하느냐?"고 그에게 묻는다. 그러면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한다. "누군가 하면 좋은데 아무도 안 하잖아요. 그렇게 재일동포 의사들이 본업을 팽개치고 할 수도 없고요"

일본은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중국 한의사들은 버젓이 자기 이름을 걸고 의술을 펼친다. 이제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재일동포 의사들 스스로가 자기의 이름을 내세울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런 장벽을 부수는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아카기 씨는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의사 면허 제도가 엄격한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에서 취득한 면허가 아니면 의사 면허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재일동포 의사 중에는 한국의 의사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사실만 거의 길이 막혔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해서 더욱 일본에 정착하는지도 모른다.


  박정희 시절에는 논문과 역사 시험을 통과하면 면접을 통해 의사 면허를 주었다고 한다. 물론 거액의 사례금은 기본이었다. 그래서 재일동포 1세 중에는 그때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 꽤 있다. 그러나 그것도 김영삼 정부 이후에 의사의 수요와 의료서비스의 질을 염려한다면서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일본인과 경쟁하면서 값비싼 의학 서적을 사지 못해 친구들에게 빌려 공부한 사람, 아르바이트로 연명한 사람, 남들이 기피하는 시체를 검시하면서 학업을 연명한 사람 등 학창시절에 그 어려운 의학공부를 한 경험은 모두 같다. 정치니 사상이니 남녀 구분없이 모두 똑같다. 어느 대학 출신 모임은 있어도 정작 재일동포 의사 모임은 없었다. 재일 한국의사회라는 명칭은 남아있지만 활동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서서히 각종 친목 모임 등이 늘어나는 추세다.

일본 중년남성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 중에 '나이 마흔이 넘으면 의사, 변호사, 은행원을 친구로 두라'는 말이 있다. 이말대로라면 아카기 씨는 의사 친구가 너무 많아서 탈이다.


이미정 2003-01-28 (132 호)  
image@arirang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