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신라와 여섯 가야의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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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신라와 여섯 가야의 흥망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9.0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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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가야의 역사는 김수로 왕의 신가야(김해)가 종주국이 되어 기원 44년에 시작되었고, 임라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고자가야(고성), 벽진가야(성주), 고령가야(함창)로 나뉘어 김수로왕의 6형제가 6가야의 왕이 되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발흥한 신라는 왕의 칭호가 초기 ‘거서간’에서 ‘이사금’ ‘마립간’으로 변천해왔고, 지증왕(기원 499년)에 이르러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신라의 국력이 어느 정도 신장되어 고구려, 백제와 겨루자는 포부를 갖게 된 것이다.

그 후 신라의 지증 ‧ 법흥 ‧ 진흥 세 대왕이 계속해서 여섯 가야를 잠식했는데,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여섯 나라가 다 신라의 소유가 되어 지금의 경상 좌우도가 완전히 통일되었다. 여섯 가야 중에 신가야, 임라가야, 아라가야가 강성하였는데, 그 흥망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다.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김해)

「신가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금관국」이라 쓴 것으로, 시조 김수로 때에는 신라보다도 강성하여, 신라의 파사니사금이 그 인근의 작은 나라인 음즙벌(경주 북쪽 경계)과 실직(삼척)의 영토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김수로왕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이에 김수로왕이 한 마디로 중재안을 결정하자, 세 나라가 다 기꺼이 복종하였다. 그 결과로 신라 파사왕이 김수로왕을 초청하여 감사의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수로왕 이후에는 신가야의 형세가 날로 미약해져서 임라가야에게 침입과 모욕을 당하다가 신라 법흥대왕 19년(기원 532년)에 제10대 왕인 ‘구해’가 나라 곳간의 재물을 모두 가지고 처자와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아라가야(함안)

백제의 문주왕(기원 475년)이 구원을 애걸하였을 때에는 아라가야는 임라가야, 신라, 백제와 함께 남방 4국 동맹에 참가하여 고구려의 침공을 막았다. 비록 소국이었지만, 당시 정치 문제에서 빠지지 않았던 나라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때에 김이사부가 강변의 군관이 되어, 말 떼를 국경에 모아 놓고 날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타고 달리게 하자, 아라가야 사람들이 그것을 보는 데 익숙해져서 예사로 알고 방어하지 않았다. 이에 지증왕 15년 즈음에 김이사부가 갑자기 습격하여 아라가야를 멸망시켰다.

임라가야는 대가야(고령)

임라가야는 ‘대가야’로도 불리는데, 처음에는 신라와 싸울 때마다 거의 이겼다. 기원 209년에 임라가야에 소속된 여덟 개의 작은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켜 임라가야를 공격하고 6천명을 포로로 잡아가자, 임라가야는 신라 나해니사금에게 왕자를 볼모로 잡히고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 태자 석우노가 6부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임라가야를 구원하여 여덟 개 나라의 장수와 군사들을 쳐 죽이고, 붙잡혀 갔던 포로 6천 명을 빼앗아서 「임라」에 돌려주었다. 그 뒤로부터 나라의 힘이 허약해져서 신라에 대항하지 못하였다.

그 후 신라 지증왕, 법흥왕이 아라가야를 멸망시키자, 임라가야 제6대 가실왕이 두려움을 느끼고 신라의 귀골 비조부와 결혼하여 스스로를 보전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신라의 습격을 당하여 망하고 말았다.

임라가야 충주 천도와 멸망

그 뒤에 고령을 떠난 가실왕은 왕족과 인민들 중에 신라에 불복하는 자들을 거느리고 백제의 도움을 받아 미을성(지금의 충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기원 554년에 백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할 때, 임라가야의 군사들도 따라갔다가 신라의 장수 김무력(신가야의 항복한 왕 구해의 아들)의 복병을 만나 양국의 연합군이 전부 몰살 당하였다. 그 후 기원 564년에 신라의 병부령 김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이 미을성으로 쳐들어 와서 임라가야를 멸망시켰다.

「임라가야」가 비록 멸망하였으나, ‘강수’의 문학과 ‘우륵’의 음악으로 그 이름을 전하여, 여섯 가야국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520년 역사를 뒤로 하고 여섯 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계립령(조령) 이남을 전부 통일하였고, 그 때부터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혈전이 시작되었다.

 

*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가야를 '가라(加羅)라고 쓰고 있다. 여섯 가라는 신加羅(김해), 밈라加羅(고령), 안라加羅(함안), 구지加羅(고성), 별뫼加羅(성주), 고링加羅(함창)으로 적었다. 당시에 쓰던 우리 말과 '이두문자' 그리고 나중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한자 용어의 차이 때문이다. '가야'는 나중에 한자 표기로 적혀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한자 표현으로, '밈라'는 '임라'로, '안라'는 '아라'로, '구지'는 '고자'로, '별뫼'는 '벽진'으로, '고링'은 '고령'으로 적혀서, 여기서는 임라가야, 아라가야로 적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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