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정치] 주지육림(酒池肉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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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정치] 주지육림(酒池肉林)
  •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6.09.0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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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중국의 역사시대는 ‘하’왕조로 시작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상’나라인데 수도가 ‘은’이어서 은나라로도 불린다. 은(殷)의 탕(湯)왕은 하(夏)왕조 최후의 군주 걸(桀)을 멸하고 상(商)나라를 열었다. 상은 600년 동안 유지됐으나 23대 국왕 무정(武丁)의 사후부터 약화되어 31대 주신(紂辛)에 이르러 멸망했다.

‘사기’에 따르면 주신은 혼미하고 무능한 인물이 아니라 뛰어난 용력과 총명함을 지닌 군주였다. 군주가 죽은 후 생전의 공덕에 따라 붙이는 별칭을 시호(諡號)라고 한다. 시법(諡法)에 따르면 신에게 주(紂)라는 시호가 붙은 것은 그가 의(義)와 선(善)을 해쳤기 때문이다.


‘달기’와 함께 주지육림

그러나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재능을 과신한 그는 누구도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교만이 포악한 정치로 이어졌다. 특히 유소씨(有蘇氏)가 바친 달기(妲己)라는 여자를 총애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다.

역사는 그의 음란함을 주지육림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무도함에 분노하는 제후와 신하들이 줄지어 이탈하자 은의 통치 집단은 사방으로 찢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주왕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가혹하다는 견해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주왕은 선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심하지도 않았다. 군자가 하류가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주왕과 마찬가지로 천하의 악평이 모두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왕의 죄상과 공적

청의 최술(崔述)은 주왕의 죄상은 5가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근세의 고힐강(顧頡剛)은 주왕의 죄악이 늘어나게 된 70가지의 사례를 지적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주왕에 대한 미움이 늘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왕의 폭정을 유발했다는 달기는 서한 말의 유향(劉向)의 열녀전(烈女傳)에 처음 등장했다고 고증했지만 달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이미 등장했다. 주왕에 대한 나쁜 이미지는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를 통해 악화됐다. 사마천의 말대로라면 주왕은 뛰어난 영걸이었다.

그는 동이족을 평정해 중국인들의 활동무대를 회하(淮河)와 장강유역으로 확대하여 황하유역에서 발달했던 중국문화를 남방으로 전파했다. 그의 업적은 고대 중국의 통일과 중국민족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혹자는 그가 중국사에 기여한 공로가 은의 무정(武丁)이나 주의 무왕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주왕에 대한 악평은 대부분 전국시대에 유포된 우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주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상서에 기재된 6가지 죄목도 사실은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자신의 정당성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신공격을 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왕을 위한 변명

주왕이 지나치게 술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원래 술을 좋아하던 당시의 음주문화를 감안하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또 귀족이나 친인척들을 등용하지 않은 것은 이복형 ‘미자’가 중심인 반대파들이 왕권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소인배를 등용했다는 비난은 당시의 권력집단에서 배제된 하급관리나 노예를 등용했다는 의미로 오히려 계급을 타파한 진보적 조치로 볼 수도 있다. 달기의 말을 너무 믿었다지만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상나라에서는 여성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주왕의 여성들은 전대인 무정 시대에 활약했던 여걸들과 다름이 없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천벌을 받았다는 말은 더욱 황당하다. 후대에 발굴된 복사(卜辭)를 감안하면 주왕의 아버지 제을(帝乙)과 주왕의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가장 많다. 그렇다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천벌을 받았을 것 같지도 않다.

주왕이 폭군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논쟁에 사용된 자료는 시비를 막론하고 같으므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기 전에는 자료의 해석을 두고 펼치는 논쟁에 불과하다. 당대의 정황에 대한 치밀한 연구를 통해 사료를 해석해야 한다.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절대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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