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한인 땀과 꿈의 100년] <5>한인 사회의 개척자, 유분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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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한인 땀과 꿈의 100년] <5>한인 사회의 개척자, 유분자씨
  • 한국일보
  • 승인 2003.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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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하와이에 102명의 첫 한국인 이민자가 발을 내딛은지 100년만에 미국의 한인 이민자 수는 100만여명으로 늘어났다.

한인 이민 인구가 1만배 이상 증가하기까지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좁은 둥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긴 초기 이민자, 한인 1세들의 개척자 정신이 큰 몫을 했다.

자신의 뿌리를 송두리째 낯선 이국땅으로 옮기는 고통과 아픔을 극복하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친인척과 친지, 친구, 이웃 등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인 수많은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한인 사회는 이제 미국 각지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가주 한인 사회에서 성공한 기업인, 커뮤니티의 지도자, 봉사자로 잘 알려진 유분자(67·비지비 프랜차이즈 대표)씨는 한인 사회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이며, 또 자신의 소중한 꿈을 실천에 옮긴 인사라고 할 수 있다. .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친지와 이웃, 동료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가난 등 어려움에서 구하고 이루기 힘들 것만 같았던 그들의 꿈에 날개를 달아줬다.

유씨는 미국 이민 초창기 20여년간을 마치 한국인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유씨는 “올 수만 있다면 무조건 미국으로 나와야 한다” “해외에 나와주는 것이 조국을 위하는 길이다”며 이민을 주저하는 친인척과 친지 등 이민 희망자들을 독려했다.

초청 가족들이 잘 정착하도록 뒷바라지는 물론 유씨 자신 차지였지만, 그는 그 어려움을 달게 받아들였다.

미국에 이민온 뒤 항상 2개 이상의 직업을 동시에 꾸려가느라 잠이 모자란데도 그는 자신의 안락을 반납한 채 이민 초청과 이민자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유씨는 “꿈을 성취하려는 각오와 조금씩 그 꿈이 결실을 맺어가는 보람이 더 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유씨는 1968년 간호사로 미국으로 건너와 75년 시민권을 받고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민 초청작업을 시작했다.

유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미국에 온 그의 직계 및 방계 가족수는 200여명이 넘는다. 또 해마다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업체인 ‘비지비’(Busy Bee)의 고용 인력 형태로 이민 희망자들을 계속 초청, 그 숫자만도 벌써 47명이 넘어섰다.

더구나 유씨가 71년에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를 창설한 뒤 한인 간호사들의 RN 자격증 준비코스를 개설, 한인 간호사의 이민과 취업을 도왔던 사례는 미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당시 여성으로서 취업 이민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야였던 간호사들의 이민 초청과 취업은 간호사 자격증 유무에 달려 있었다.

자격증을 따서 취업한 그들은 다시 그들 가족과 친지들을 미국으로 초청했기 때문에 유씨의 간호사 자격증 준비 코스 개설이라는 아이디어는 70년대와 80년대 엄청난 한인 이민 붐을 뒷받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밖에도 유씨의 삶과 행동, 그리고 진지한 설득에 감동해 미국 이민의 꿈을 키우고 결국에는 이민을 실행한 이민자 숫자는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다. 주변에서는 직ㆍ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아 미국 땅에 발붙인 한인들의 수가 1,000명은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씨는 자신이 초청한 친지나 한인들의 이름은 물론이려니와 더더욱 숫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초청하거나 또는 이민 과정을 도와 미국에 온 이들이 남가주를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각자 제 몫을 하면서 이제 그들의 자녀들이 코리안 아메리칸 2세, 3세로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대견하고 감개무량하다고 말한다.

유씨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인들을 미국으로 초청하고 이민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한다. 특히 한국에서도 잘 살고 잘 지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한국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는 꿈이나 소망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데려오고 싶다고 한다.

유씨는 “아직도 내게는 그런 분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랑과 희생으로 뛸 의욕이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유씨는 충북 옥천 출신이다. 생활이 어려워 대전 간호학교로 진학한 유씨는 졸업 후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덕성여대, 숙명여대에서 다시 공부를 계속한 뒤 미8군 병원 근무를 거쳐 대한적십자사 초대 간호사업국장으로 일했다.

한국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던 그였지만 68년 텍사스주 달라스의 병원과 고용계약을 맺고는 서슴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부장적인 관습과 인식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 한국에서 남편과 세살 된 딸과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을 떼놓고 혼자 해외로 진출했던 이유에 대해 유씨는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가부장적 제도에 짓눌려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나라도 먼저 헤쳐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로 유씨는 지금도 한국에서 제대로 꿈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미국 이민을 돕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직계 한, 두 가족을 초청하는 것도 골치 아파하는 일반 한인들과 비교하면 그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더욱이 그는 친지나 주변을 초청해서 초기 정착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이민자의 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유씨가 34년동안 한 집에 살면서 한번도 바뀌지 않은 전화번호를 사용한 것만 보아도 그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75년 이민한 유씨의 언니와 오빠들 대부분은 이민 다음날부터 지금까지 유씨와 한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

1999년과 2001년, 유씨에게는 특별한 이벤트가 LA에서 열렸다. 유씨의 초청으로 1975년 3월25일 어머니(한복님·78년 미국서 타계)와 6남매(오빠 3명, 언니 3명) 가족이 한 비행기로 미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모든 직계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동안 미국 각지와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 다시 가족을 이루고 그들이 다시 자녀를 낳아 누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게 된 시점에서 가족의 뿌리를 찾고 재결속하는 행사를 연 것이다.

그것은 68년부터 시작된 유씨 일가의 미국 이민 족보를 정리해 보는 작업이기도 했다. 다만 이번에는 유씨의 딸 캐롤 리(39·한국명 이주연ㆍUEC사 회장)가 어머니를 대신해 이 작업의 총지휘를 맡았다.

주연씨는 먼저 외조부모를 한 그루의 나무로 만들고 그 밑에 부모인 이규철, 유분자씨 가정을 포함한 유씨의 친남매 7명 가족을 1대 뿌리로 그려 넣었다.

7남매들은 모두 50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들이 다시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전체 가족 수는 순식간에 119명으로 훌쩍 늘어났다. 해가 지날수록 이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외조부모 대로부터 따지면 5대까지 내려가는 뿌리지도가 완성됐다. 첫 해인 1999년 크리스마스에는 이들 중 무려 87명이 필라델피아, 시애틀, 샌호제, 샌프란시스코에서 날아와 부에나팍 더블트리 호텔에 모였다.

직계 가족이면서도 서로 흩어져 정착하느라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해 서먹서먹했던 가족들, 특히 청소년 자녀와 어린이들은 함께 하루 이틀을 지내면서 ‘물보다 진한 핏줄’의 위력에 끌려 부쩍 가까워졌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그 밑으로 갈래갈래 뿌리 내린 족보 그림에서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이름을 찾아내고 자신들의 이름을 직접 써넣으면서 아이들은 신기해 하고 또 재밌어 했다.

한번 시작된 이들의 ‘리유니언’은 2년 후인 2001년 크리스마스에 옥스퍼드 팰리스 호텔에서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75명의 친척들은 이전보다 더욱 친밀한 분위기속에서 만났다. 한국, 파라과이, 중국으로 이주해 2년 전 행사에 참가하지 못했던 가족들도 일부 합류했다.

99년 첫 모임이 1세들 주축이었다면 2001년 모임은 주로 2세들이 연락책이나 프로그램 등을 맡아 진행했다. 가계도 뿌리에는 2년 사이에 10여명의 새 식구 이름이 올랐다. 이들은 앞으로도 2년에 한번씩 뿌리 모임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로스엔젤레스=특별취재반

<사진설명>
미국 이민자들은 이민생활중에도 가족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전통을 잊지 않았다. 1936년 교회에서 백일잔치를 연 이민자들
/로스앤젤레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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