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광개토태왕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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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광개토태왕의 전성시대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7.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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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광개토태왕 23년, 장수왕 78년, 101년의 전성시대

광개토태왕(제19대)은 ‘중국대륙을 휩쓴 백제의 영웅’ 근구수왕이 즉위한 해인, 기원 375년에 태어나서 391년에 17세 나이로 즉위하고, 413년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 아들 장수왕은 413년에 즉위하여 491년까지 다스리니 재위 78년으로 부자가 합산하여 101년간 다스렸고, 고구려의 제2차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광개토태왕이 재위 23년간 전쟁하여 적국들을 두루 제압한 덕분에, 장수왕은 노회한 외교전략으로 78년간 전쟁하지 않고 국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백제 근구수왕은 태자 시절, 기원 372년에 평양을 침공하여 광개토태왕의 증조부 ‘고국원왕’을 살해했다. 태자 근구수의 침공으로 고국원왕(제16대)이 죽고, 수도 평양을 점령당하여 다시 환도성으로 천도하고 그 아들 소수림왕(제17대)이 즉위하여 간신히 백제를 방어할 정도의 약소국이 된 것이다.

소수림왕의 아들 고국양왕(제18대)은 조부가 백제에게 살해당한 것을 절치부심하여 국력 회복에 전심하였다. 중국의 진왕 부견이 동진을 치다가 대패한 공백기를 포착하여 요동, 낙랑, 현토 등을 다 회복했다. 그러나 선비 ‘모용수’가 호시탐탐 요동을 다투고, 과려족이 신성을 침공하는 등 고국양왕은 북쪽 국경 지키기에 급급하여 남방의 백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태왕의 과려족 원정

태자 담덕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태왕의 자리에 올라, 과려족이 자주 변경의 우환거리가 되므로, 즉위 후 5년(기원 396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과려족 본거지 6~7백 개의 부락을 격파하고 소와 말, 양떼들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수문비사>에 의하면, ‘파부산’은 지금의 음산산맥의 와룡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의 감숙성 서북의 아랍선산이라고 하였다. 염수는 아랍선산 밑에 ‘길란태’라는 곳으로 여섯 자의 소금이 호수 주변에 응결되는 곳이다. 

광개토태왕의 정벌이 지금의 감숙성 서북까지 미쳤던 것인데, 이는 고구려 역사상 유일한 장거리 원정이다. 위의 원정은 <삼국사기>에는 빠져 있고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에만 기재되어 있는데, 과려는 곧 흉노의 후예이다. 


백제 정벌

백제가 고구려 태자 ‘담덕’에게 석현 등 10여 주·군을 빼앗긴 것을 통분하게 여겨, 기원 391년에 진사왕이 진무로 하여금 고구려의 새 점령지를 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교류하여 대 고구려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 후 태왕 5년(기원 395년)에 과려 원정을 끝내고 회군하면서, 고구려군은 수군으로 백제의 바닷가와 강가의 일팔성, 구모로성, 고모야라성, 관미성 등을 함락하고, 육군으로 미추성, 야리성, 소가성, 대산한성 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태왕이 몸소 갑주를 두르고 아리수(지금의 월당강)를 건너 백제의 군사 8천여 명을 죽이니, 백제 아신왕이 궁지에 몰려 왕의 아우 한 사람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바치고, 남녀 1천명, 가는 베 1천 필을 바치고 종이 주인 섬기듯이 하겠다는 ‘노객’의 맹약 문서를 쓰고는, 고구려를 피하여 사산(지금의 직산)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이라 칭하였다. 


왜구 격파, 신라 구원

그 뒤에 고구려가 북방 선비와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백제는 그 맹약을 깨고 왜병을 불러들여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침입하고,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이 되는 것을 미워하여 왜병으로써 신라를 쳤다. 

그러나 태왕의 용병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늘 백제의 기선을 제압하여 왜를 습격하여 깨뜨리고 신라를 구원하였으며, 임나가라(지금의 고령)에서 왜병을 대파하였다. 그래서 신라 나물왕(제17대)은 몸소 광개토태왕을 찾아가서 신라를 구원한 것을 사례했다. 

기원 407년 지금의 대동강 수전에서 광개토태왕은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왜병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갑주 1만여 벌과 무수한 군수물자와 무기를 얻었다. 왜가 이로부터 항복하고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여 남방이 오랫동안 평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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