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백제 근구수왕의 중국대륙 경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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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백제 근구수왕의 중국대륙 경략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7.1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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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삼국시대 초기에는 고구려가 중국과 대결할 수 있는 북방의 강대국이었다. 백제는 마한 50개국을 병합한 중진국이고, 신라와 가야는 한반도 남쪽의 십여 개의 작은 나라들 중에 하나였다. 


태자 근구수의 고구려 압박

백제의 전성시대를 말하려면 첫째는 기원 375년에 즉위한 근구수왕이고, 둘째는 기원 479년에 즉위한 동성대왕이다. 두 대왕의 업적은 중국대륙을 침입하여 광대한 영토를 장악한 것이다. 그 당시의 중국은 통일제국이 아니고 여러 나라로 분열된 상태였다.

근구수왕은 아버지 근초고왕 재위 기간에 십여 년간 태자로서 군국대권을 대신 행사하여 침입해 오는 고구려를 격퇴하였다. 요동과 요서지역을 중국에게 빼앗긴 고구려는 남방에서 세력을 만회하려고 백제를 침공한 것이다. 그러나 기원 369년에 고구려 고국원왕의 2만 군사를 백제의 태자 근구수가 ‘반걸양 전쟁’에서 격파하고 패하(대동강 상류) 이남을 전부 백제 땅으로 만들었다.

반걸양 전쟁 후 3년에 고국원왕이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고 정예병 2만을 거느리고 패하를 건넜는데, 미리 매복하고 있던 태자 근구수가 기습 공격으로 고국원왕을 사살하고 패하를 건너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에 고구려가 평양에서 다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국원왕의 아들 소주류왕(소수림왕)을 세워 백제를 방어하였다.


근구수왕의 대륙 경략

백제 근초고왕은 황해도 재령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열병식을 거행하고 서울을 상한성(재령)으로 옮겨 더욱 북방으로 진출하기를 꾀하였다. 그러나 태자 근구수의 목표는 한반도 북방이 아니라,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을 경략하는 것이었다. 태자 근구수는 해군을 크게 확장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대륙을 침입하였다. 

기원 375년에 즉위한 근구수왕은 재위 10년 동안 고구려에 대하여는 단 한 차례 평양을 공격한 적이 있을 뿐이지만, 바다를 건너가서 중국 대륙을 침입하여 선비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아 요서, 진평 두 개 군을 설치하고, 녹산(하얼빈)까지 쳐들어가서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원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에서는 진왕(秦王) ‘부견’이 강성하므로 근구수왕이 또 진과 싸웠는데 지금의 산동성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들이 도망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강소, 절강 등지를 차지하고 있던 진(晉)을 쳐서 또한 다소의 주, 군을 빼앗았으므로 여러 사실들이 양서(梁書), 송서(宋書),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 384년에 근구수왕이 죽고 장자 침류왕이 이어받은 지 2년 만에 또 죽으므로, 차자 ‘진사왕’이 즉위하였다. 진사왕은 총명하고 용감하며 무예가 뛰어났으나, 천성이 호탕하여 근구수왕이 성취한 강국의 권력을 빙자하여 인민을 혹사하였다.


근구수왕 사후의 국제정세

진사왕은 청목령(송도)으로부터 팔곤성(곡산)까지 성책을 쌓고, 다시 서쪽으로 1천여 리의 장성을 쌓아서 고구려의 침입을 막으려 했다.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초유의 궁실을 건축하고, 연못과 인공 산을 만들고 기화요초를 길러서 온갖 오락을 즐겼다. 이로써 인민들로부터 원한을 샀고, 해외의 영토는 적국에게 모두 빼앗겨 나라의 형세가 갑자기 쇠약해졌다.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백제의 진사왕과 동시대 인물인데, 조부 ‘고국원왕’이 피살당한 원수와 강토가 삭감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늘 백제를 벼르고 있었다. 이때에 중국에서는 선비 모용씨가 진(秦)에게 망하고, 진왕 부견이 동진(東晉)을 치다가 대패하였으므로, 고국양왕이 이를 기회로 요동, 낙랑, 현토 등지를 다 회복하였다. 

고국양왕은 즉위 후에 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회복하고, 과려(거란)족을 격퇴하여 북쪽 국경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남방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고국양왕 말년에 이르러 태자 담덕, 곧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영무하여 병권을 맡아 신속한 전략으로 백제군을 습격하여 석현 등 10여 성을 회복하였다. 

진사왕은 고구려 태자 담덕에게 여러 차례 크게 패하여 재령(황해도)에서 하남 위례성(경기도 광주)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에도 담덕의 용병을 무서워하여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한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천험의 관미성(강화)도 또한 고구려 해군에게 함락되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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