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이민 100주년]<8>그늘속의 불법체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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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이민 100주년]<8>그늘속의 불법체류자들
  • 동아일보
  • 승인 2003.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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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1994년 사기를 당해 미국으로 도피했던 C씨는 “미국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관광비자로 입국해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주저앉은 그는 부인과 함께 3년 동안 접시닦이, 청소부, 공사장 잡부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일감이 없는 날엔 틈틈이 제빵기술도 배웠다. 그의 성실성에 감동한 고용주들이 서로 C씨를 불러 일을 맡겼고 이들의 후원으로 미 정부의 노동허가서를 받은 데 이어 입국 7년 만에 영주권까지 땄다. C씨는 “운이 좋았지만 불법 체류자도 열심히 하면 살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미국을 주저 없이 ‘기회의 땅’으로 부른다. 성실하면 돈을 모으고 실력이 있으면 명문대 입학도 어렵지 않다는 의미.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이민자에게나 통하는 얘기로 C씨와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다.

한국에서 직원 20명을 거느렸던 중소기업 사장 L씨.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여유 있게 노후를 준비하던 40대 후반에 외환위기를 맞았다. 부도를 내고는 ‘아이들 학비라도 보태겠다’며 1999년 부부만 캐나다 국경을 넘어 밀입국, 로스앤젤레스의 낡은 아파트에 거처를 구했다. 아내가 식당에서 일하는 사이 L씨는 페인트를 칠하는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몇 달간 뼈 빠지게 일한 대가는 찾지 못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임을 안 공사업자가 ‘신고할 테면 해보라’며 배짱을 부린 것. 결국 생활고에 병까지 얻은 L씨는 2000년 말 자살했다.

1999년 캐나다 국경을 넘은 K씨 가족. 브로커에게 이런저런 명목으로 2만달러나 뜯긴 뒤 가까스로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정착했지만 신분이 들통날까봐 반년 동안 고등학생 아들을 집안에서 키웠다. 운전면허증을 따지 못해 차도 못 사고 타운만 빙빙 돌아다닌다. 부부가 얼굴 볼 틈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해 한 달에 4000달러 정도 수입을 올리지만 집 임대료 등을 덜어내면 언제나 빠듯하다.

더 큰 문제는 아들 K군의 앞날. 고교 졸업을 앞둔 그는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불법체류자인 자신을 받아주는 대학을 아직 찾지 못했다.

K군이 다니는 L고교는 전체 학생 4000명 중 1000명이 한국인. 이들 중 상당수가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어쩌다 입학을 허용하는 대학에서도 신분 탓에 재정지원 등을 받기 어려워 엄청난 학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남가주한인노동상담소(KIWA)의 박영준 소장은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와 함께 한인타운에 갇혀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며 “이들에겐 하루하루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1997년 관광 왔다가 북부 캘리포니아에 주저앉은 A씨(29·여)는 ‘남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의 사회보장번호, 운전면허증 및 회사 신분증에는 3000달러를 주고 브로커에게서 ‘구입한’ 가짜 이름이 적혀 있다. 디자인 기술을 배우러 다니는 학원의 수강료도 이 이름으로 은행에서 빌렸다.

A씨의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다. 신분이 들통나면 그동안 미국에서 쌓아올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추방당하기 때문. 친구들은 요즘 빨리 시민권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 자신의 이름을 찾으라고 채근하고 있다.

미 이민국(INS)이 정한 불법체류자는 체류기간을 넘기거나, 입국 목적과 다른 활동을 하거나, 아예 밀입국한 사람들을 말한다.

미 상무부가 지난해 발표한 한인 불법체류자는 18만2000명. 그러나 외교통상부가 미국 내 지역별 한인회 회원통계 등을 토대로 산출한 한인은 212만3000명(2001년 기준)으로 미 인구센서스(2000년)에 나타난 한인 107만7000명보다 100만명가량 많다. 어림 계산으로도 불법체류자는 18만명을 훌쩍 넘길 것 같다.

불법이 합법으로 바뀌는 길은 시민권자와 결혼하거나 미 정부의 양성화 조치를 기다리는 것. 실제로 2000년 12월부터 2001년 4월까지 불법체류자들의 영주권 신청을 허용하는 이민법(245i) 조항을 되살린 적이 있다. 최근엔 불법체류자 자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5년 거주’ 조건을 붙여 영주권 신청기회를 주자는 드림액트(Dream Act) 운동이 벌어져 한인사회가 들썩거리고 있다.

그러나 9·11테러와 워싱턴 연쇄 저격사건 등에 밀입국자와 불법체류자들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이후 미 당국의 이민정책은 갈수록 ‘틈새’를 막아가고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민법 245i 조항의 발동을 계속 미루고 있고 오히려 올해부터 대학 당국의 유학생 감시활동을 강화하는 등 비자 목적에 어긋나는 체류자들까지 솎아낼 태세다. 이민국이 최근 발표한 2002년 11월 각종 이민승인 및 거부율 현황을 보면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서류 승인율이 25%나 줄어든 반면 거부율은 25% 늘었다.

코리아리소스센터 심인보 소장은 “미국은 경기가 나빠지고 국가적인 위기감이 고조될 때면 이민자들을 비난과 경계의 표적으로 삼곤 했다”며 “불법 이민자들의 권익 찾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이민 제대로 가려면…피해야 할 4가지▼

미국 스탠퍼드대에 ‘연구하러’ 간 K교수. 1년간 머물 수 있는 방문비자(J-1)로 입국, 주중 3일은 골프장에서 보내고 주말엔 여행 다니기 바쁘다. K씨의 일상을 대학측이 이민국(INS)에 통보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울법무법인 노영호 미국 변호사에 따르면 체류 목적을 어긴 만큼 ‘불법’체류자로 분류돼 엄밀하게 말해 추방 대상이 된다.

미국에서는 이민법에 어두워서 선의의 불법체류자가 되기 쉽다. 언어장벽이 높은 데다 비싼 수임료 때문에 변호사를 멀리한 탓도 있다. 또 한국에선 이민수속을 밟을 때부터 잘못된 정보를 맹신하다 낭패를 보기도 한다. 다음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이민 제대로 가기 위한 ABC’.

▽오버 스테이(over-stay)에는 가혹한 제재가 뒤따른다=가장 일반적인 불법체류는 체류 허용기간을 넘기는 오버 스테이. 귀국하지 않고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다른 비자로 바꾸는 합법적인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당장 추방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버 스테이가 180일을 넘으면 한국으로 돌아오더라도 3∼10년 동안 비자를 신청할 수 없다. 과거 복수비자로 미국에 들어간 뒤 현지에서 투자이민 비자(E-1, E-2)로 바꾸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9·11테러 이후 감독이 강화돼 비자를 바꿔도 왕래가 매우 어려워졌다.

▽밀입국은 무의미하다=밀입국자 중엔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에 해당하는 사회보장번호(SSN)도 받고 아이들을 공립학교로 보내거나 심지어 세금을 내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민당국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법체류자 신분이어서 들통나면 추방당한다.

▽‘책임진다는’ 이주공사 맹신은 금물=이주공사는 영주권을 발급하는 곳이 아니라 이민신청 절차를 지원하는 기업. 영주권 발급은 미국 영사의 권한이다.

국내에 설립된 이주공사는 70개 안팎이지만 영주권 발급을 자신하다 펑크를 내고 간판만 바꿔 단 이주공사도 있다. 한 해 2200개의 허위 노동허가서 신청서를 작성한 혐의로 지난해 11월 유죄평결을 받은 미국 변호사 사무엘 쿠리츠키에게 물린 국내 이주공사도 4, 5곳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이민송출 실적을 세밀히 따져보고 관련 법규 위반사례가 있는지 찾아본다.

▽미국 고용회사를 잘 파악해야=미국 이민의 대부분은 취업이민. 대개 이주공사 등 국내외 이민 브로커들이 소개하는 미 기업과 고용계약을 하고 떠난다. 따라서 고용기업의 매출액이나 신용상태 등을 확인하고 고용계약도 이직이 잦은 직원보다 대표와 체결해야 한다.

도움말 한울법무법인 노영호 미국 변호사(02-522-7700), 신세계이주공사 박필서 사장(02-548-4100)

▼특별 취재팀▼
홍권희 뉴욕특파원 konihong@donga.com
박래정 국제부기자 ecopark@donga.com
김정안 국제부기자 credo@donga.com
김선우 사회1부기자 sublime@donga.com
강병기 사진부기자 arche@donga.com
등록 일자 : 2003/02/10(월)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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