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국원왕의 전사와 백제의 북방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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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국원왕의 전사와 백제의 북방진출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6.0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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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의 대결 국면

▲ 이형모 발행인
기원 331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죽고, 아들 고국원왕이 즉위하여 '선비'와의 전쟁에서 완패하고 환도성까지 빼앗겼다. 고국원왕은 이에 북방경영을 포기하고 ‘남진주의’를 취하고 백제를 자주 침벌하게 된다. 요동을 잃고 국력이 약해진 고구려의 지배력이 소멸되자, 지배받던 백제가 대결국면으로 전환한 것이다.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의 치세로서, 총애 받는 왕후 진 씨의 친척 ‘진정’이 좌평이 되어 세도를 믿고 백성의 재물을 침탈하고 20 여 년간 국정을 어지럽혔다.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는 영명하여 마침내 진정을 몰아내고, 폐정을 개혁하고, 북쪽의 ‘대방’(황해도 장단)을 항복시켜 백제의 군, 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육군의 편제를 개혁하고, 해군을 처음으로 설치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을 침략할 야심을 가졌다.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

이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환도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하여 선비에게 실패한 치욕을 남방에서 보상받으려 하여 백제를 자주 압박하였다. 기원 369년에는 기병과 보병 합하여 2만의 군사를 다섯 가지 깃발로 나누어 거느리고 '반걸양'까지 이르렀다.

태자 근구수가 나가서 싸울 때, 백제의 도망병으로 고구려군에 참전한 ‘사기’가 탈영하여 백제군에 제보하기를 “고구려의 군사 수가 많으나 숫자만 채운 군인들이고, 오직 적기병(赤騎兵)만이 용맹하니 그들만 깨치면 나머지는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근구수가 그 말을 좇아 용감한 정예병을 뽑아 적기병을 깨뜨리니 고구려군이 무너져 수곡성 서북(신계)까지 진격하였다. 그곳에 기념탑을 만들고, 패하(浿河: 대동강 상류) 이남을 전부 백제 땅으로 만들었다.


고국원왕의 전사와 백제의 북방진출

반걸양 전쟁 3년 후에 고국원왕이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고 정예병 2만으로 ‘패하’를 건넜는데, 백제의 근초고왕이 근구수를 보내어 미리 강 남안에 복병하였다가 기습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사살하고 패하를 건너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에 고구려는 평양에서 다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국원왕의 아들 소주류왕(삼국사기에서는 소수림왕)을 세워 백제를 방어했다.

근초고왕이 상한수(재령강)에 이르러 열병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서울을 상한성(재령)으로 옮겨 더욱 북방으로 진출하기를 꾀했다. 근초고왕은 영명한 태자 근구수의 활약에 힘입어 고구려를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밀어내고 북방진출까지 꿈꾸게 됐다. 그러나 태자 근구수의 목표는 한반도 북방이 아니라, 바다 건너 중국 대륙을 경략하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다시 국내성으로

만주의 요동을 놓고 중국과 다투던 고구려가 선비에게 패하여 북방을 잃고, 다시 백제 ‘근구수’에게 도읍지 평양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치욕을 당했다. 평양성에서 국내성으로의 천도는 고구려가 백제의 침입과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삼국사기는 고국원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사실을 기록하고, 소주류왕이 국내성으로 다시 옮긴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가 국내성을 고국천(故國川), 고국양(故國壤), 고국원(故國原)이라고 불렀는바, 천도할 때 고국원왕의 시체를 국내성으로 가져와서 매장하였으므로 ‘고국원왕’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국내성 천도의 증거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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