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구려 미천왕과 선비 모용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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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구려 미천왕과 선비 모용외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5.2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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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북방민족 '선비'는 늘 고구려에 복속하여 용맹한 추장 ‘단석괴’가 있을 때에도 고구려 명림답부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고구려가 발기의 난을 겪으면서 요동을 잃고 쇠약해지자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기원 250년경에 선비는 우문씨, 모용씨, 단씨, 탁발씨의 4부족으로 나뉘어 다투었는데, 모용씨 중에 창려 태극성(동몽고 특묵우익)에 본거지를 둔 ‘모용외’가 가장 강성하였다. 이때에 중국의 위, 오, 촉 삼국이 다 멸망하고 진 사마씨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자주 모용외에게 패하여 요서지역이 소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봉상왕의 망국정치

기원 280년 고구려 13대 서천왕 11년에 예(숙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서천왕의 동생 ‘달가’가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서천왕이 죽고 그 아들 봉상왕이 즉위하자 봉상왕은 백성의 신망을 받는 구국영웅 ‘달가’를 시기하여 처형했다.

명장 달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선비 ‘모용외’가 기원 292년 신성으로 순행 나온 봉상왕을 급습하였다. 신성 성주 ‘고노자’가 기병 돌격대 5백으로 모용외의 군사를 대파하고 봉상왕을 구하니, 모용외가 놀라서 더 이상을 침입하지 못했다.

교만해진 봉상왕이 흉년과 가뭄으로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돌보지 않고 궁실을 건축하니 사람들이 흩어지고 달아나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신가(국무총리) ‘창조리’가 극력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자, 봉상왕에게 처형당한 아우 돌고의 아들 ‘을불’을 망명지에서 찾아내,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세우니 15대 ‘미천왕’이다.
 

미천왕 요동을 되찾다

기원 300년부터 331년까지 미천왕 재위 31년은, 곧 선비 ‘모용씨’와의 혈전의 역사이다. 첫째는 현토 회복이다. 미천왕은 즉위 2년에 현토성을 파하여 8천여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기고 16년에 마침내 현토성을 점령하였다.

둘째는 낙랑 회복이다. 기원 314년에 진나라 사람 ‘장통’을 공격하여 낙랑, 대방을 점령하니, 장통이 달아나 모용외의 부장인 낙랑왕 ‘모용준’에게 구원을 애걸했다. 모용준과 장통이 함께 반격했으나 패하고,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었다.

셋째는 요동 전첩이다. ‘양서’에 기록하기를 “을불(미천왕)이 빈번하게 요동으로 쳐들어갔는데, 모용외는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중국의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 '사마씨'를 침공하여 빈번하게 괴롭힌 모용외로서도, 미천왕에게는 이기지 못하였다. 현토와 낙랑이 이미 차례차례 정복되었으므로 겨우 몇 개 현 만 남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다.

기원 331년에 미천왕이 죽고 16대 고국원왕이 즉위하였는데, 3년 후에 선비의 모용외도 죽고 아들 ‘모용황’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아들 고국원왕이 미천왕보다 야심은 컸으나 재략이 미치지 못하여, 선비의 모용황에게 철저하게 패배하고 제3환도성(집안현)을 빼앗겼다.
 

환도성 세 차례 이전

환도성의 세 차례 이전은 고구려 전반기 성쇠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6대 태조대왕 때에 왕자 ‘수성’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1환도성(개평)을 쌓았던 때가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 제1차 전성시대’이고,

발기의 배반으로 요동이 공손씨에게 넘어가고 10대 산상왕이 제2환도성(환인현)을 쌓았다가 위나라 ‘관구검’에게 파괴된 때가 쇠락한 시기요,

미천왕이 낙랑, 현토, 요동 등을 차례로 회복하여 중흥하다가 중도에 죽고, 16대 고국원왕이 제3환도성(집안현)에 옮겨 쌓았다가 모용황에게 파괴당하니 이것이 가장 쇠락한 시기이다.

미천왕 재위 31년 ‘중흥기’의 역사적 의미는 ‘고구려 중쇠시대’에 요동과 요서를 향한 고구려의 도전과 집념을 성공시켜 '뚜렷한 기억'으로 남긴 것이다. 그가 죽은 지 60년 후에 19대 광개토태왕이 즉위하여 고구려 제2차 전성시대를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한국상고사’에서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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