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구려와 중국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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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구려와 중국 삼국시대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5.12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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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기원 227년 고구려 연우왕(10대 산상왕)이 죽고 그 아들 동천왕이 즉위하니, 이 때에 중국은 4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삼국시대인 위(조조, 장강 이북), 오(손권, 장강 이남), 촉(유비, 사천성) 그리고 요동(공손도, 난주 이동과 요동반도)이다. 요동을 빼앗긴 고구려는 요동의 ‘공손도’와는 적국 사이였고, 촉과는 너무 멀어 통할 수 없었다.

 

 

고구려, 위나라와 공수동맹으로 요동패망

동천왕이 처음에는 오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나 관계가 부실하여, 위 황제 ‘조예’에게 밀사를 보내어 ‘공수동맹’을 체결했다. 고구려가 요동을 치면 위나라가 육군으로 돕고, 위가 오나라를 치면 고구려가 ‘예’의 수군으로 위나라를 도와주며, 두 적국을 멸한 뒤에는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오’는 위나라가 차지하기로 약속했다.

기원 237년에 동천왕이 ‘신가’ 명림어수와 ‘일치’ 작자, 대고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주어 요동왕 공손연을 치게 하였는데, 위나라에서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수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위나라 군사가 패하여 돌아가자 공손연은 전력을 다해 고구려의 침입을 막았다.

다음 해에 위나라가 태위 사마의를 보내어 10만의 군사로 공손연을 치게 했다. (소설 삼국지에서 태위 사마의는 촉 승상 제갈공명의 공격을 기산에서 여러차례 막아낸 인물이다.) 사마의는 먼저 관구검으로 하여금 요수를 공격하여 요동 수비군 ‘비연’ 등과 대치하게 해놓고, 사마의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몰래 북으로 진군하여 공손연의 서울인 ‘양평’을 포위하였다. 포위된 공손연은 30 여일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나가 싸우다가 붙잡혀 참수를 당했다. 공손도가 요동을 차지하고 3세 공손연에 이르러 50년 만에 망했다.

 

관구검의 침입과 제2환도 함락

위나라가 공손연을 쉽게 토벌한 것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배후를 견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나라는 공손연을 죽이고 요동의 전부를 항복시키고 나서도 고구려와 맺은 맹약을 어기고 한 조각의 땅도 고구려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동천왕이 화가 나서 자주 군사를 일으켜 ‘위’를 토벌하여 서안평(양수 부근)을 함락시켰다.

기원 245년경에 위나라가 동천왕이 자주 침입해 오는 것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수만 군사로 쳐들어왔으나 동천왕이 비류수에서 적군을 대파하여 3천명을 목 베어 죽이고, 양맥곡까지 추격하여 또 3천명을 죽였다. 이에 동천왕이 승리에 도취하고 자만하여 여러 장수와 대다수 병력을 후방에 남겨두고 왕 자신이 몸소 ‘철기 5천’ 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관구검이 남은 군사를 총동원하여 맹렬히 반격했다. 동천왕의 군사들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후방의 고구려 본진의 군사들도 놀라서 도망하여 사상자가 1만8천명이나 되었다. 동천왕은 1천여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간신히 압록강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은 드디어 환도성(안고성)에 들어가서 궁실과 민가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역대의 문헌과 전적들을 다 실어 위나라로 보냈다.

 

서북 만주지역 국가에서 ‘동남지역 국가’로

‘제2 환도’가 철저히 파괴되자 동천왕의 ‘서북정벌’이란 웅심이 차가운 재로 변하여 지금의 대동강 위의 평양으로 천도하니, 이것이 고구려 남천(南遷)의 시작이다. ‘제2 환도’의 파괴와 평양 천도는 조선 고대사에 있어서 대단히 큰 사건이다.

평양 천도 이전에는 고구려가 늘 서북으로 발전하여 흉노, 중국 등과 충돌이 잦았으나, 평양 천도 이후에는 백제, 신라, 가라(加羅) 등과 접촉하게 되어 북방보다는 남방과의 충돌이 많았다. 고구려가 광활한 만주의 ‘서북지역 국가’에서 한반도 평양 중심의 ‘동남지역 국가’로 된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한국상고사’에서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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