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노동요를 부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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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노동요를 부르는 이유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6.03.2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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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일은 즐거운 것인가, 고통스러운 것인가? 한국인은 일을 즐거워했을까? 무슨 말 같지 않은 질문이냐고 핀잔을 주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은 무조건 괴로운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다시 묻고 싶다. 일은 정말 고통스러운가?

일이 힘들어서 고통을 잊기 위해 불렀다는 노동요가 있다. 노동요라는 말은 노동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이다. 정말 일이 힘들어서 노래를 불렀을까? 노래는 ‘놀다’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 노래는 기본적으로 노는 것이고 즐거운 것이다. 내가 볼 때 정말 힘들면 노래가 안 나온다. 입에서 단내만 풀풀 나올 뿐이다. 노동요는 굳이 말하자면 일을 즐겁게 하려고 부르는 노래이다. 노동요를 부르면서 일을 하다 보면 일도 즐거워지고 일도 금방 끝이 난다.

나는 일은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로 가족이 기쁘고, 또 누군가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내가 고생을 해서 아이들이 행복하다면 어찌 노동을 마다할까? 오히려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이 들 때 이왕이면 즐겁게 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노동요가 나온다. 일이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그 모든 사정을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튼 저마다의 사정은 다를지 모르나 일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결론은 틀림없다.

노동요는 일의 고통을 잊으려는 목적 외에도 ‘함께’라는 생각을 깊게 만든다. 혼자 있을 때는 노동요를 잘 안 부른다. 여럿이 있을 때,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노동요를 부른다. 그래서 노동요는 단순한 리듬이 반복되고 정해진 가사도 없는 경우도 있다. 계속 자신의 사연을 담아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다. 몇 연까지 되는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또한 지방마다 가사가 다른 경우도 많다. 그것은 동네마다 사연이 다르기 때문이다.

종종은 남편 욕도 하고, 시어머니 욕도 하지만 그래도 깔깔대고 웃다 보면 서러움이나 원망도 한풀 꺾인다. 이른바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노동요에 이런 내용의 가사가 해학적으로 그려진 것도 웃으며 풀어버리라는 뜻이 담겼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노동요를 통해 삶을 다시 살 용기도 얻는다. 이야기였다면 서로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노래이기에 맞장구 대신에 같은 후렴구를 반복하여 서로 같은 생각임을 보여준다.

노동요에는 효심이 듬뿍 담겨 있기도 하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하는 이유가 부모님 봉양과 가족 부양에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가요 중에 ‘상저가(相杵歌)’라는 노동요가 있다. 서로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는 노래인데 그 가사는 대강 이런 내용이다. ‘덜커덩 방아를 찧어/거친 밥이나마 지어서/아버님 어머님께 바치고/남거든 내가 먹으리.’ 방아를 찧으며 이 밥을 맛있게 드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힘이 났으리라. 상저가에는 ‘히얘!, 히야해!’라는 힘을 돋는 감탄사가 나온다. ‘아자아자/으샤으샤’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일이 즐거워야 한다는 우리 조상의 생각이 노동요 속에 담겨 있다. 70년대 80년대 노동의 현장에서는 크게 틀어 놓은 음악 소리가 위안이 되었다. 일을 하면서 노래를 따라하다 보면 어느새 일이 끝나 있기도 했다. 음악이 시간의 흐름이었고, 음악이 삶의 리듬이었다. 노동요를 고통과 연결시키기에는 우리네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은 듯하다.

노동요를 들을 때마다 나는 고통을 떠올리기보다 삶을 그대로 상상한다. 가족이 소중하고, 마을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일을 끝내고 힘들지만 기쁜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의 굵고 빛나는 땀을 기억한다. 노동요는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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