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민 100주년]<6>코리안 아메리칸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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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민 100주년]<6>코리안 아메리칸 '나는 누구인가'
  • 동아일보
  • 승인 2003.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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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가을 미국 하버드대 캠퍼스에서는 개교이래 처음으로 한국계 학생들의 풍물패 공연이 펼쳐졌다. 징과 장구 꽹과리가 동원된 이 공연은 대학동아리 ‘굿거리’가 기획한 것이었다. 주축 멤버는 미국에서 자란 6명의 한인학생이었고 취지는 주한 미국기업의 도산으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 한국 노동자들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을 위해 시작한 모금 공연이었지만 공연 과정에서 그동안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느꼈던 혼란과 고립감이 차츰 사라졌다.”

당시 문리학과 3학년이었던 박경신씨(34·변호사)가 털어놓은 후일담이다. 백인 주류문화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던 한인 학생들에게 풍물패는 서로를 껴안고 공감대를 나눌 수 있는 ‘문화공동체’이자 ‘해방구’였다는 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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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UC 버클리 법학과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유명 법무법인의 고위직인 ‘파트너’ 자리에까지 오른 필립 신씨(40). 성공한 이민 2세인 그도 한때 심각하게 정체성이 흔들렸다.

“난 항상 다수(majority)와 달랐다. 다르다는 이유로 동양적인 외모에도 콤플렉스를 느끼게 됐다. 미디어가 주입시킨 미(美)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씨가 ‘자기 자신’을 되찾은 것은 1990년 후반. 4세 때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다녀온 뒤의 일이었다. 한국이 이상하리만큼 편하게 느껴졌고 한국어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한인 이민사 관련 서적을 파헤칠 때는 뿌듯함마저 느꼈다. 신씨는 때때로 미국인 부인에게 “내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며 자신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이해하고 동참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 초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온 김기수씨(56). 갖은 고생 끝에 마련한 신발가게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으로 불타고 난 뒤 극심한 무력감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스스로 한국인이라 생각했지만 고국은 너무나 멀었고, ‘정의로운 곳’으로 믿었던 미국사회에 배신감을 느끼게 됐다.

미 정부에서 주선한 저금리 융자와 기부금을 합쳐 1년 뒤 다시 가게를 연 그는 최근 뒤늦게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고국을 저버리는 것 같아 취득을 망설였던 시민권도 발급받았다. ‘재미 한국인’이 아니라 ‘코리안 아메리칸(Korean American·한국적 문화배경을 지닌 미국인)’으로서 당당히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미주 이민 한인들 대부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그러나 자신을 한국인으로 여기고 미국사회의 주변인으로 남은 1세들이나 주류사회에의 동화만을 염두에 둔 2세, 3세들에게는 해답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코리안 아메리칸’이 그 해법으로 본격 부상한 것은 로스앤젤레스 폭동 이후의 일이다. UCLA 박기영 교수(인류학)는 “폭동이 번지면서 미 언론의 왜곡 보도가 잦았지만 언어장벽에 갇힌 1세들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며 “여기에 분노한 1.5세, 2세들이 적극 나서면서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폭넓게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스탠퍼드대 신기욱 교수(사회학)는 2년 전 기이한 경험을 했다. 유치원을 다니는 딸이 몸이 아파 병원을 찾았는데 낯선 의사 앞에서 딸이 그날따라 유독 무섬증을 느낀 듯 의사의 영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를 쳐다보며 한국말을 떠듬떠듬 하더라는 것. 미국에서 태어난 딸과 신 교수는 집에서도 영어를 쓰고 있다. 신 교수는 “부녀를 연결해 온 끈이 바로 실낱같은 한국말이었던 것 같다”며 “정체성의 핵심은 언어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20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유고명씨(샌프란시스코 의대 국제진료센터 고문)는 과거 딸이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주저없이 한국으로 역유학을 보냈다. 한국말을 모르고선 한인사회 내 유대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덕분에 지금은 장성한 딸이 다른 한인 2세와 달리 영어를 못하는 외할아버지와도 정겹게 지낸다.

다인종들이 섞여 살며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미국사회는 그동안 ‘용광로(melting pot)’로 간주됐다. 그러나 인종간 갈등과 반목이 끊이지 않고 주류사회 진입장벽이 높은 현실에서 각 인종의 문화적 특징을 존중하자는 현실론이 부상하고 있다. 막강한 파워를 가진 유대인들이 성탄절 밸런타인데이 등 미국식 기독교 전통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문화체계를 고수하는 점이 좋은 사례. 코리안 아메리칸에 주목하는 한인사회의 정체성 세우기도 이 현실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민 2, 3세에게 정체성 위기는 언젠가는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화제작 ‘네이티브 스피커’의 저자로서 이민 2세인 이창래 프린스턴대 교수는 “아직도 많은 한인 학생들이 ‘어떤 것이 한국적인가’ ‘어느 정도 한국적이어야 코리안 아메리칸일 수 있느냐’라고 물어온다”고 말했다.

UC 리버사이드의 장태한 교수는 한인이민사를 학교 교재로 채택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청소년 시절 미국으로 건너온 세대라는 의미의 ‘1.5세’라는 말을 처음 사용, 대중화시킨 찰스 김 한미연합회 사무국장은 “한국적인 유산을 미국의 합리주의 정신과 접목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1992년 4.29 LA폭동과 2002년 월드컵▼

1992년 4월29일 흑인시위대의 방화와 약탈로 폐허가 된 로스앤젤레스 한인 쇼핑타운. -동아일보 자료사진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쓰인 미주 이민사(史)에 가장 큰 획을 그은 대형 사건은 단연 ‘4·29’로 불리는 로스앤젤레스 폭동과 2002 월드컵이라 할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1992년 4월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집단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로 풀려난 것이 도화선이었지만 흑인 시위대가 한인타운으로 몰려가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한인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당시 미 사법당국과 지역언론들은 무자비한 경찰과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 미 사회에 잠복한 근본문제보다 한흑(韓黑)갈등에 초점을 맞췄다. 이로 인해 한인들이 입은 정신적 상처는 물질적 피해 못지않게 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한인들을 미 주류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찰스 김 한미연합회(KAC) 사무국장은 “보이지 않는 소수(invisible minority)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한인들이 비로소 미 현대사에 등장하게 된 전환점이 바로 4·29였다”고 말한다. 중국계 이민사회는 일찍이 19세기 미 철도 건설사업 이후, 일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 주류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4·29세대’. 당시 부모 1세대들이 흑인들에게 형편없이 당하는 것을 지켜본 이들은 11여년이 지난 지금 법조계 의료계 정치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어느 세대보다 왕성하게 한인 권익운동에 나서고 있다.

한편 2002년 월드컵은 한인사회를 문화적으로 결속시킨 사건이었다. 한국팀이 4강에 오르는 동안 수십만명의 한인들이 밤을 새우며 응원전을 펼쳤다. 로스앤젤레스시내 ‘스포츠의 메카’로 불리는 스테이플스센터는 한-터키전을 맞아 하루 임대료 15만달러와 상당한 주차료 수입을 포기하면서까지 1만여명의 한인들을 위해 실내경기장을 개방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스페인어 채널인 유니시온(UNICION)이 강력한 압박축구를 구사하는 한국팀의 전 경기를 중계방송함으로써 주시청자인 라틴계 미국인들에게 한국과 한인사회는 어느 때보다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 UCLA 박기영 교수는 “형편이 되면 한국으로 여행을 가겠다는 라틴계 미국인이 크게 늘었다”며 “4·29로 상처 입은 한인들이 월드컵으로 정체성을 되살리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풀이했다.

▼특별취재팀▼
홍권희 뉴욕특파원 konihong@donga.com
박래정 국제부기자 ecopark@donga.com
김정안 국제부기자 credo@donga.com
김선우 사회1부기자 sublime@donga.com
강병기 사진부기자 arch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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