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무엇의 대명사(代名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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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무엇의 대명사(代名詞)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6.03.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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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대신하거나 대표하는 말

▲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우리말은 대명사가 발달하지 않은 언어입니다. 특히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는 거의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말에서는 어른을 대명사로 바꾸어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어른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대명사는 ‘당신’ 정도일 것입니다. ‘너’를 높여 부르는 2인칭 대명사가 아니라 ‘그, 그녀’를 높여 부르는 3인칭 대명사일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인데, 점점 사용이 줄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스승님을 떠올리며 이야기할 때 ‘당신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라든지, ‘당신께서 좋아하시던 노래’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는 그리움이 묻어있기도 합니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때 가장 많이 실수하는 부분도 대명사입니다. ‘그녀가 어머니입니까?’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면 대명사의 사용이 얼마나 어색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대명사를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실수를 줄이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녀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계셨다’라는 번역은 얼마나 이상한가요? 영어에서는 자연스럽게 ‘She’를 사용할 자리이지만 ‘그녀’로 번역하면 큰일 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그, 그녀’라는 대명사는 ‘구한말, 개화기(개화기라는 표현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안 듭니다. 꼭 그전에 우리가 미개한 민족이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정도에 생긴 표현들입니다. ‘그녀’라는 표현은 지금도 여전히 이상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그녀는’의 발음이 ‘그 년은’의 발음과 같아서 아주 상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일부러 비꼬거나 오해를 만들기 위해서 ‘그녀는’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입니다. 그와 그녀는 일본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소나기를 쓰신 황순원 선생께서는 ‘그녀’라는 표현 대신 ‘그네’라는 표현을 쓰시기도 하였습니다. ‘-네’가 ‘여인네’나 ‘아낙네’ 등에 쓰이는 인칭 접미사이기에 응용이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네’가 ‘그녀’와 같은 의미라고 보기는 어려운 점도 많습니다. ‘그네’는 왠지 연인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말 표현에서 ‘대명사’는 ‘무엇의 대명사’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최근의 기사를 찾아보니 ‘청순의 대명사, 정직의 대명사, 청렴의 대명사’라는 표현들이 보입니다. 이 말들은 주로 사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청아한 여배우에게는 ‘청순의 대명사’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거짓이 없는 법조인에게는 ‘정직의 대명사’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부정부패와 관련이 먼 공무원에게는 ‘청렴의 대명사’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이런 대명사는 모두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의 대명사’는 사람에게만 붙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에도 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식당의 대명사, 스포츠카의 대명사, 한복의 대명사’와 같은 표현으로도 쓰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만든 물건이 무엇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무엇의 대명사’는 나쁜 일에도 사용됩니다. ‘폭군의 대명사, 부정부패의 대명사, 불친절의 대명사, 잦은 고장의 대명사’로도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대명사는 어떤 단어를 떠올리면 동시에 생각이 나는 사람이나 물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나는 무엇의 대명사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게으름의 대명사, 늦잠의 대명사, 폭음의 대명사’ 같은 표현들 말고, ‘좋은 아빠의 대명사, 좋은 선생님의 대명사’와 같은 수식어가 붙기 바랍니다. 물론 이런 수식어는 내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붙이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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