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민족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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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민족이 되기를
  • 김삼오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 승인 2016.03.0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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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삼오 씨는 호주 시드니에서 37년째 살고 있는 동포 독자이다. 커뮤니케이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호주에서 한국어 신문을 창간해 발행하기도 했고 <언론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한울사, 2001)>의 저자이기도 한 필자는 올해 1월 19 일자 재외동포신문 인터넷 판에 게재된 ‘신성대 칼럼 : 뻔뻔함과 무지스러움, 한국의 힘?’을 읽고 느낀 소감을 편집국에 보내왔다. 기탄없는 의견이 담긴 글을 한국사회 및 동포사회에서 공유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기고문의 요지를 요약, 정리해 소개한다. 필자의 의견은 재외동포신문의 편집방향과 무관함을 밝힌다. - 편집자

 
 
이 글은 재외동포신문에 실리고 있는 ‘신성대 칼럼’에 대한 찬사와 맞장구, 더불어 제가 평소 고안해 놓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윤리적 행태의 방정식’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먼저 칼럼 필자 신성대 동문선 대표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그의 해박한 한문 고전 지식과 유머러스한 은유법으로 정곡을 찌르는 평론이 돋보인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뻔뻔함과 무지스러움, 한국의 힘?’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필자는 “서구인들은 범죄자들을 끔찍이 경멸한다”고 쓰셨는데 적절한 지적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어 감옥을 들락거린 재벌 오너들의 행태’와 관련해서”그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된다는 사실에 대해 아연실색한다”라고 하였는데 역시 공감합니다. 
 
호주의 사례를 예로 들면,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재벌 총수인 알란 본드 씨 사건입니다. 배임 수재로 기소되어 4년 실형을 복역하고 석방되어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하고 77세인 지난해 심장병으로 사망했습니다. 1983년 그가 재정 지원한 호주 요트팀이 아메리카 컵 요트 레이스에서 우승했을 때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었습니다. 당시 본드대학 창설 등  다양한 사회적 기여를 해서 국민훈장도 받았지만 실형을 선고받은 후 국민들의 정서는 싸늘해졌습니다.
 
한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거시적 변수는 제도(정책과 법과 기구), 전문인력, 국민행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한국 사회의 혼란상은 세가지 가운데 마지막인 국민행태, 특히 윤리적 행태에 그 뿌리가 있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서구의 발전 모델을 그대로 도입한 한국은 잘못된 국민행태를 빼고는 거의 선진국 수준입니다. 미국 박사도 많고, 특히 사법고시라는 등용문을 거쳐 출세한  똑똑한 법관 출신이 대부분 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법 제정과 변론 실력은 1등입니다.
 
그런데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법과 제도와 전문성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실형이든 형 집행유예든 유죄인 범법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을 더 걱정해야 할 텐데 배짱이 두둑한 사람들이 한국에는 많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실세 정치인이면 예외 없이 상대의 보복 또는 물타기라며 비호하는 세력이 있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본인도 당당합니다. 한 때 비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시 정당이나 국회에 보란 듯이 입성하는 기현상도 한국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돈과 이권으로 회유하면 하루아침에 딴소리를 하는 기회주의 정치인,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그냥 쓰러져 버리는 국민들도 문제입니다. 망국병인 기회주의를 처벌하는 법은 없습니다. 법이 만능이 못 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고국의 이런 현실을 오래 지켜보면서 저는 사회를 개혁하는 길은 거창한 구호나 정책, 전문성이 아니고 비리를 미워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시민과 사회풍토를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일명 ‘윤리적 행태 실천과 비실천의 방정식’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언론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pp.167-170, 2001년 한울사 간 참조).
 
도식으로 될 일은 아니지만 올바른 행동의 실천을 위한 장기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통해 그 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교육의 근본 원리는 100여 년 전 ‘조건 반사 이론’을 내놓은 러시아 심리학자 이반 파브로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이익과 불이익 (reward and punishment)’의 상관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방정식도 사람은 이익이 되면 실천(행동)하고, 불이익이 되면 실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이 때 이익은 물론 금전적 이득, 직위, 안위 등이고, 불이익은 금전적 손해, 실직, 고통 등입니다.
 
그냥 행태가 아니라  특별히 ‘윤리적 행태’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일상생활 중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태는 실천으로 옮기면 이익이 되므로 내버려 두어도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하여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윤리적 행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게 저절로 잘 된다면 가만두어도 사회는 잘될 텐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참 아이러니컬하고 불행한 일입니다. 윤리적 행태의 좋은 예는 윤리와 도덕 교과서나 보통 법규정에서 열거되는 ‘행동 강령’들입니다.
 
이런 중요한 분야에서 지행불일치(知行不一致)가 더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실천으로 옮기면  이익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간 한국의 여러 연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 가지 비근한 예이지만 이게 지금 한국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방정식은 이런 풍토를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하면 윤리적 행태가 이익이 되고 보상 받는 사회풍토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한 가지 모델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 이익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유혹 (금전, 직위, 기타 이권)

(1)법의 제재 + (2)양심(심적 불편) + (3)청렴에 대한 사회적 인정(명예) + (4)여론의 제재(남의 눈)
 
윤리적 행태에서 일탈을 가져오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금전과 직위와 기타 이권 등의 이익들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유혹입니다. 이게 방정식의 분자입니다. 그 유혹에 대한 제어 장치 (deterrent)는 (1)법률상 제재 (2)양심 (3)청렴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명예 (4)여론의 제재, 네 가지입니다. 이들이 방정식의 분모입니다. 
 
방정식이 말해주는 것은 이렇습니다. 윤리적 행태의 일탈은 이익과 이권, 유혹의 크기에  정비례하고 유혹에 대한 제어 장치들의 강도에 반비례한다, 즉 제어 장치의 실효성이 크면 클수록 일탈의 확률은 적어진다는 예측입니다. 분자의 경우 뇌물은 좋은 예입니다. 뇌물의 액수가 크다면 평소 청렴하던 사람도 말려들 수 있습니다.
 
한국적 상황에서 위 4가지의 제어 장치들을 점검해보겠습니다. 
 
첫째 법의 제재. 이건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이미 말한 셈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생긴 정도입니다. 
 
둘째 양심의 가책입니다. 이는 평소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인간은 심한 내부 갈등, 즉 고뇌를 겪게 된다는 심리학 이론에 따르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의 말이 기억납니다. 살인범은 심적 괴로움을 못 이겨 나중에 반드시 자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옛날 옛적 이야기 같습니다. 요즘은 구체적 증거를 보여주고 거짓말 탐지기를 갖다 대도 그런 일 없다고들 부인하지 않습니까? 심장에 털이 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셋째는 이권을 초월하는 정신적 보상이 있다면 그것도 큰 제어력이 된다는 가정입니다. 예컨대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그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명예를 얻게 되어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면 일탈은 줄어들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받는 사회적 또는 정신적 보상이 물질적 희생을 덮어주는 사회라면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첫째와 둘째 조건이  윤리적 행태를 권장하는 소극적 접근이라면 후자는 적극적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녹록치 않습니다. 한국사회가 청렴한 사람을 오래 기억해주는 사회인가요?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 큰 돈을 번 재벌 총수가 아니라면 우리 국민은 금방 망각하고 맙니다.
 
하나 남은 마지막 희망은 여론의 제재입니다. 그건 신성대 필자의 말 대로 범죄자들을 끔찍이 경멸하는 사회라야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범법자가 부끄러워 낯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된다면 어디 감히 범법을 밥 먹듯 하겠습니까? 그 기능은 국민의 몫입니다. 국민은 다름 아닌 우리들 각자 개인입니다.
 
매사에 비관론을 펴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국민이 똑똑하고 진실해야 이 난세를 헤쳐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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