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소리]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 3.1절
상태바
[작은소리]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 3.1절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2.26 15: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형모 발행인
고종의 근대화 작업

조선 25대 고종 임금은 1852년에 태어나, 1863년 12월에 즉위하였다. 1863년~1864년에는 조대비가 섭정했고, 1864~1873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했다. 1873년부터 1907년 퇴위할 때까지 친정했다. 재위기간은 44년이다.

고종황제는 국제정세를 이해했고 1863년 친정을 시작하자 곧바로 일본과 수교하고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청,일의 침략정책을 간파하고, 미국을 신뢰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어 안보전략으로 삼고자 했다. 상비군 3~5만을 육성해서 국방을 강화하고 국제적으로 ‘영세중립국’으로 공인받고자 추진했다. 

특히 1897년부터 1907년까지 ‘광무개혁’을 추진하여 근대화 작업에 괄목할 성과를 거두자, 일본은 조선침략이 어려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퇴위의 빌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호머 헐버트와 3인의 밀사’를 보내어,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일본의 침략야욕에 대한 대한제국의 입장을 국제적으로 호소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이후 일본은 속전속결, 강압적으로 1910년 7월 29일 ‘합방’을 강행했다.


태황제 독살 추진

“2009년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에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발견되었다.”(위키백과)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3대 조선통감이고, 1910년 1대 조선총독을 지내고 1916년 일본총리가 되었다.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발표하자 태황제(고종)가 다시 움직일 것을 우려하여 독살을 추진했고,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장례행렬 ‘대여’가 떠나는 날, 경운궁 대한문 앞에 모인 백성들은 태황제의 죽음을 슬퍼했을 뿐만 아니라, 44년 재위기간과 퇴위한 이후에도 12년 동안 불굴의 투지로 애국 애민한 태황제에게 충성을 표하고 그의 유지를 받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손병희 선생을 위시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선포되는 것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조선 8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고종황제가 죽고 대한제국이 패망한 자리에,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으로 ‘독립의 기치’를 높이 들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한 날이 ‘3.1절’이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임시정부는 국호를 조선공화국(초안)에서 대한민국으로 변경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9년 3.1 만세 함성의 힘으로 임시정부를 세운다. -(대한독립) 만세함성은 독살된 고종황제에 대한 애도와 충성의 소리 - (국호는)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민국으로서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세상은 우리 민족이 죽은 것으로 생각했으나,
우리 민족은 다만 잠시 잠들어 있었고,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어,
나라와 민족을 되찾아 잠에서 깨어나고자 부단히 투쟁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