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19. '진정 재능 있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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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19. '진정 재능 있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
  •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 승인 2015.11.0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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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2주 전, 한국 음악계의 가장 큰 경사가 있었다. ‘피아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조성진 씨의 소식이 그것이다. 보랏빛 머금은 이 가을의 정취에 금가루가 뿌려지는 듯한 감격을 느끼며 그의 실황 곡을 듣고 또 들었다. 내년 2월에 있을 갈라 콘서트가 예매 시작 50분 만에 매진되었다고 하니 그의 폭발적인 인기를 실감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30여 년 전(1980년)에도 이와 유사한 수상 소식이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바로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의 ‘부조니 콩쿠르’ 우승이다.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각인되어 있으니 그 당시 얼마나 큰 뉴스였는지 추측해 볼 만하다. 비록 1위없는 2위 우승이었지만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의 쾌거라 할 만큼 감격스런 소식이었다.

   ‘서혜경 씨’... 그 분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한국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 정돈을 하고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이 찾으셨다. 학부모 한 분이 담임을 보고 싶어 한다고. 

   “선생님, 제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바빠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  다. 그동안 제 딸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리스마가 물씬 풍기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그 분과의 첫 만남은 영광스러움과 편안함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대학 교수를 맡고 있어 한국에 오래 머물고 계셨었는데 뉴욕에 왔을 때 남매의 한국학교 담임을 만나러 오신 것이었다. 당시 우리 반이었던 딸 희주(가명)는 엄마의 부재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많았으련만 혼자 숙제와 일기도 잘 해오고, 밝고 따뜻한 성격으로 우리 반 최고의 인기 학생이었다.

   2002년 여름은 월드컵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고, 가을엔 12월에 있을 ‘맨해튼한국학교 20주년 기념행사’ 준비로 ‘맨해튼’이 들썩였다.^^ 교사회의에서 어떤 프로그램으로 행사를 구성할까 논의를 하던 중, 모두들 서혜경 씨의 축주를 넣기를 원하며 당시 교무이자 희주의 담임인 나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나 그 분이 12월 중순에 뉴욕에 있을지도 모르는데다가, 학교의 순서 하나를 위해 세계적인 음악가에게 부탁한다는 것도 결례가 될지 모르기에 나는 선뜻 말씀드려 보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국의 대학이 방학을 12월 중순에 하니 날짜도 맞을지 모를 일이고 하루이틀차이로 뉴욕에 도착한다고 해도 시차로 피곤한 분에게 연주를 부탁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연락해보는 것도 포기,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아쉬워 행사 일주일 전, 슬쩍 희주에게 물어보았다. 

   “희주야, 엄마 오셨니?”
   “아니요…”ㅠ.ㅠ ​

   12월 15일, 오랜 간 준비한 ‘20주년 행사’ 시작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데, 서혜경 씨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사각사각 운치 있는 한복 소리를 내며 사회석에 있는 나에게 다가오셨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왔어요. 학교 안내문을 보니 한복을 입고 오라고 해서 입고 왔어요... ”
   피곤에 치친 몸으로 와주신 것도 감사한데 신경 써서 한복까지 입고 오시다니... 그 분의 등장만으로도 감격스러웠던 나의 마음이 더욱 벅차올랐다.

   “선생님, 제가 학교 20주년 생일 축하 연주를 하고 싶어요...”
   “네????”

   기쁘고 감격스런 어조로 서혜경씨를 소개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가 맨해튼한국학교 20회 생일을 위해 축하 연주를 해주시겠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피아노 연주 소리임)... ♫♬♩♪♬”

    본 연주에 앞서 ‘생일 축가’를 그녀의 찬란한 솜씨로 편곡하여 들려주었는데 그 어떤 교향곡보다 더 웅장하고 감격스런 생일축가였다. 곧이어 이어진 본 연주는 학교 강당을 어느새 링컨센터 못지않은 명 공연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학교의 평범한 피아노가 그녀의 마이더스 손이 닿으니 명품 피아노가 되어 우리들 마음에 금가루를 뿌려 주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축하 연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감격스럽게 행사의 포문이 열렸고, 20주년 행사는 더욱 빛을 발하며 진행되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이전에 '엄마'로서의 서혜경 씨가 보여준 학교 사랑이 학교에겐 영광이요,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겐 행복과 벅찬 감동의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그 분의 학교 사랑, 후세 사랑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 동북부 지역에 있는 한국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치러질 ‘나의꿈말하기 대회(2005년 4월 30일)’를 우리 학교가 주최하게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지역대회인데다가 나 또한 교장이 된 후 처음 치르는 큰 행사라 겨울 방학 때부터 열성적으로 준비를 하였다. 특별 순서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로 고민하던 차, 서혜경 씨 생각이 났다.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여 성공한 한인을 모시고 싶었던 나로서는 서혜경 씨 이상의 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분이 뉴욕에 있기에는 한국이 한창 학기 중이라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며 전화를 드렸는데, 마침 5월 초에 링컨센터에서 독주회가 잡혀 있어 그 때 뉴욕에 계신다고 하니 우연치곤 정말 큰 행운이었다. 조심스럽게 행사의 특별순서를 부탁드렸는데,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셔서 날아갈 듯이 기뻤던 기억이 새롭다. 모시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건만 나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덧붙여 여러 요구를 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순서라서요... 연주하시면서 곡에 대한 설명도 해 주시고, 학생들이 꿈을 키울 수 있는 말씀도 부탁합니다... 그리고 대회 팜플렛에 실을 기사를 인터뷰 하고 싶은데 시간이 되시는지요?”
   “인터뷰요? 음... 내일 모레 공연 리허설이 제 스튜디오에서 있어요. 몇 분만 모시고 하는데 선생님도 초대할게요.” 

   맨해튼 서쪽에 있는 그녀의 스튜디오로 찾아갔다. 나까지 7명이 모였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고, 손톱 끝까지 보이는 바로 곁에 앉아 연주를 듣는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그의 개인 연주 공간에서 그렇게 가깝게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앉아 있는 내내 감격으로 다가왔다. 엄청난 양의 악보를 다 외워서 치는 프로정신과 열정적인 연주에, 2시간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온 몸, 온 마음으로 연주한 그 분은 숨을 아주 가쁘게 몰아쉬었다.


   “선생님 오신다고 갈비 준비하라고 했어요. 인터뷰는 집에 가서 저녁 먹으며 합시다. 실은 배가 많이 고파요.” 
   혼신을 다해 2시간 동안 피아노를 치는 것은 같은 시간동안 100미터 질주를 한 것 같은 에너지 소비가 있다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알게 되었다...

   아늑하게 꾸며진 집,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서혜경 씨는 옆집 친구 같은 편안함을 주며 자신의 예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재능이 있었기에 꿈을 이루는 과정이 더 수월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진정으로 재능 있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그 분이 철학자처럼 느껴짐과 동시에 세계 정상을 향한 노력이 얼마나 각별했나를 알 수 있었다. 어렸을 적, 철저했던 어머니의 연습 감시(?)에 화장실에 가면 조금이라도 더 쉬려고 일부러 늦게 나왔을 정도라고 하니 어릴 때부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자기와의 싸움을 혹독하게 치러 온 성공 과정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당시 ‘건반 위의 여신’이라 불리며 호평을 받았건만 그 분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서혜경 씨!, 한 때는 고통으로 피아노를 쳤지만 이젠 즐기는 경지에 왔다는 말을 들으며 진정한 성공은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터뷰를 마친 늦은 밤, 다시 연습실로 향하는 그 분의 뒷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드디어 나의 꿈 말하기 대회 날! 학생들의 발표가 끝나고 심사를 하는 동안, 특별순서로 서혜경 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뒤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대가의 연주를 더 가깝게 호흡하기 위해 앞으로, 앞으로 모여든다. 학생 발표보다 더 집중하며 듣는 관중들... 괴테의 시를 보고 곡을 썼다는 ‘슈베르트’의 ‘마왕’이 웅장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우리의 마음속으로 달려온다. 마왕의 유혹, 아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내용 설명과 함께 표정에 실고, 그 감정을 다시 피아노로 옮겨 놓는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일인극 같은 퍼포먼스를 연출하며 설명을 하고 연주를 하니 모두들 마법에 걸린 듯 빠져 든다. 그리곤 이어지는 ‘쇼팽’의 감미로움, ‘라흐마니노프’의 웅장함... 꽃잎이 굴러가는 소리,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를 그 분의 연주에서 느끼며 우리는 어느 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아이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분주하다. 아이들 또한 그녀의 노력과 열정을 거울삼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공한 한인으로 우뚝 서는 꿈을 꾸리라 믿으며 흐믓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사인을 받은 한 학생이 내게 다가왔다. 자신의 꿈이 피아니스트라며, 오늘 다시 더욱 큰 꿈을 꾸게 되었다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습을 보니 행사를 준비로 힘겨웠던 모든 과정들이 감격과 보람으로 넘쳐 난다.

   이렇게 해서 ‘제1회 미동북부 나의꿈말하기대회’는 성황리에 마쳐졌다. 본 대회도 좋았지만 서혜경 씨의 마무리가 정말정말 훌륭하고 감격스러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분 덕분에 꿈을 발표하는 대회가 아닌, 꿈의 축제 한마당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상을 한 아이들뿐만 아니라 발표한 학생, 그리고 참석한 아이들 모두 자신의 꿈을 키우기 위한 행복한 결심을 했으리라 믿는다. 부모님 손을 잡고 돌아가는 그들의 감격스런 표정을 보며, 아이들의 내면에서 자라고 있는 꿈들이 힘차고 아름답게 피어나길 소원했다... 
  
   * 학교의 중요한 행사 때마다 구원의 천사처럼 나타나 자리를 빛내 준 서혜경 피아니스트께 이 지면을 빌려 지금까지도 그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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