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려야 할 무용가 최승희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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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려야 할 무용가 최승희의 전설
  • 월간 아리랑
  • 승인 2004.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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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려야 할 무용가 최승희의 전설  
일제하 전세계가 그녀의 무대공간이었다  


월간 아리랑 arirang21@arirang21.com



■글 /김정동(목원대 교수, 문화재 전문위원))  
■E-mail:cdkim@mokwon.ac.kr

되살아나는 최승희
나는 지난 1월 말, 대전 시립무용단 단원들 앞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바닥은 마루이고 주위는 온통 유리였다. 느낌은 여타 강연장과 아주 달랐다. 마음도 즐거웠다. 나는 그들 중 누군가는 훗날 최승희(崔承喜)와 같은 세계적인 무용가가 되리라 확신하며 말을 풀어 나갔다.

우리 근대사에서 최승희만큼 값진 선구자는 없었던 것 같다. 타고난 무용가라고들 하지만 그녀만큼 노력해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아마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일제하에 태어난 여자로서….
그녀의 행동무대는 조선을 벗어나 일본, 중국 그리고 유럽, 미주 대륙까지 뻗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칭송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잊혀져 있다. 죽은 날도 모른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일까.

‘자유의 언덕’으로
최승희(1911-196?)는 일제 치하에 들어간 1911년 11월 24일, 경성 관수동에서 해주 최씨 정건의 딸로 태어났다. 2남 2녀 중 막내였다. 어려서는 종로구 수은동(授恩洞)과 체부동(體弗)을 오가며 어렵게 살았다. 1922년 4년제 숙명여학교에 입학했다. 최승희는 여학교 졸업을 이틀 앞둔 1926년 3월 20일, 일본의 전위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 漠, 1886-1962) 무용 발표회를 구경하게 되었다.
이시이는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배운 신세대 무용가였다. 그는 원래 1911년 제극가극부(帝劇歌劇部)에 제 1회 연구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웠다. 1922년 유럽 순회 공연을 해 일본인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1926년 일본에 금의환향했다.


그 여세를 몰아 3월 21일부터 사흘 동안 경성에서 첫 공연을 갖게 된 것이다. 소공동(당시는 長谷川町)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열린 것인데 최승희는 큰오빠 최승일(崔承一)과 함께 보았다.
졸업 후의 진로를 걱정하고 있던 그녀는 이날 이시이의 문하생이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최승일은 일본대학 문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평소 이시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경성역 그릴에서 이시이와 동생의 유학을 주선하게 된다. 매우 발빠른 결정이었다. 최승희는 1926년 4월 3일 졸업을 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는 일본에서 활동하게 되는 14년의 첫 걸음이었다.

자유의 언덕에서
최승희가 일본에 갔을 때는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는 아직 설립 이전 단계였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연구소는 원래 도쿄 변두리에 있었으나 1927년 10월 메쿠로 구(目黑區) 지유게 오카(自由ゲ 丘)로 옮겼다. 건물을 새로 지었고 당시로는 목욕시설도 있는 최신 시설로 지은 것이었다. 빚도 많이 진 건물이었다. 1928년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연구소를 드디어 창립한 것이다. 제자로는 역시 최승희가 1번이었다.


‘지유게 오카’라는 동네 이름에 마치나 죠(町)가 붙지 않는 멋쟁이 동네 이름이었다. 지유게 오카는 아름다운 언덕이란 이미지로 왔다. 1928년 지유게 오카란 이름은 주민들에 의해 붙여진 것이었다.
도쿄의 중심을 야마노테(山의 手)라 하는데, 제 1야마노테는 분쿄 구(文京區) 혼고다이(本鄕台)를 말하고, 제 2의 야마노테는 신주쿠(新宿), 시부야(澁谷), 미나토 구(港區)를 말한다. 제 3의 야마노테는 메쿠로(目黑), 세다야(世田谷), 수기나미(杉竝), 제 4의 야마노테는 다마(多摩), 가나가와(神奈川), 사이타마(埼玉)를 말한다.


지유게 오카와 수기나미 구는 제 3의 야마노테에 해당되었다. 최승희의 도쿄에서 초기 3년간은 대부분 이곳에서 이뤄졌다. 1929년 3월 이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자유란 말은 태평양전쟁 즈음 군부의 신경을 건드렸다. 동네 이름에 무슨 자유냐는 것이었다. 당시 자유란 말은 미국을 칭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 이름을 고수했다. 이 동네는 1955년부터 1965년경에 번창했다. 중산계급의 거리가 형성되었다. 당시 중산계급은 상업주, 관료, 군인 등을 말한다. 그들이 교외주택을 선호했던 것이다. 현재 이곳의 이미지는 고급 동네, 젊은 여성, 패션성의 세 가지로 대표된다. 고급주택가가 둘러쳐 있다. 1966년 지유게 오카는 지유가 오카(自由ガ 丘)로 고쳐졌다.(《동경인》,1993.11)

공연 시작
최승희의 첫 공연은 1926년 6월 22일, 도쿄 호가구 좌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 무용단 단원으로 출연하면서부터였다. 이어 한 달 뒤 히비야 공회당에서도 공연했다.  
1927년 10월에는 매일신보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첫 귀국 공연을 한다. 그녀는 일약 조선 대중의 우상이 되었다. 우미관에서도 추가 공연을 한다. 1928년 11월에도 경성에서 공연한다.

최승희는 1929년 3월 이시이와 결별하고 경성으로 돌아 왔다. 러시아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남대문 밖 남산 기슭 후루이치죠(古市町)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현재의 용산구 동자동(東子洞)이다. 1930년 11월 적선동으로 옮겼고 이어 한강 상류 서빙고로 전전한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단성사에서 최승희의 무용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최승희는 이시이의 문하를 나와 자기 독립의 처녀 공연을 하던 때였다고 한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무용이란 것인데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조잡한 것이었다고 했다.(대한일보, 1969.4.7-1970.12.10)
최승희는 1931년 5월 9일 와세다 노문어과 학생인 안막(安漠)과 결혼했다. 안막은 당시 삼청동 아래 팔판동에 살고 있었다. 안막은 부여 예산군수를 지낸 안기선의 아들이었다. 결혼식은 청량리의 청량원에서 열렸다.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로 신혼여행을 갔다. 서빙고 그녀의 연구소에 신혼을 차린다. 그러나 신혼은 즐겁지 않았다. 딸을 하나 낳았으나(안승자) 안막이 반일운동을 하여 체포되었고 그녀는 내내 풀리지 않았다. 조선의 암울한 상황이 그녀를 조이고 있었다.

재일 조선인의 희망
1933년 3월 4일 경성을 떠났다. 도쿄의 이시이와 다시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이시이 연구소 부근 지유게 오카 218번지 오노라는 펌프 수선집 2층에 있는 세 칸짜리 다다미방에 세를 들었다. 두 번째의 도쿄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 15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연습에 투입했다. 보통사람은 하기 힘든 일이었다.

1933년 5월 20일 도쿄 시내 한복판 진구(神宮) 가이엔(外苑)에 있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신작발표회를 열어 격찬을 받았다. 《신동아》는 이 때 일을 기록하고 있다.(1934.12)

폭풍우임에도 불구하고 초만원을 이룬 공연장에는 최승희의 무용 예술의 가장 참된 감상자들이 꽉들어찼다… 이천여 관중의 흥분의 열기 속에서 나는 조선을 생각했고 우리들의 무희 최승희의 거대한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그 날 밤의 조선인 관중들은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이때 그녀의 이름은 사이 쇼오키였다.
조선의 딸은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녀의 키는 ‘5자 4치 2푼’이라 기록되고 있다. 당시 여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늘씬한 몸매였다. 그녀의 관중을 사로잡는 눈빛과 조선의 신비한 매력이 담긴 춤사위가 일본인을 사로잡았다.
김정완(金貞完) 화백의 의상은 그녀를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김정완은 1937년 파리 전람회 동양부분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1등상을 수상한 당대의 일류 화가였다. 스탈린, 히틀러, 윈저 공의 초상화를 그려 주목받았다고 한다.(정병호, 앞책, 421쪽)


더구나 그녀의 무용은 거의 다 반나체형이었다. 극우파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70)같은 사람은 그녀의 춤이 ‘전 나체의 스트립보다 훨씬 에로틱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 6.11-1972.4.16)는 이때의 무용발표회를 보고 당대의 일본 신진 여류무용가로서 그녀를 제1인자로 꼽았으며, 전후 발표한 장편 『무희(舞姬)』에서 그녀의 예술을 다루었다.
친일문학가 김문집(金文輯)은 《조광》(1936.6)에 쓴 「인기 최고정(最高頂)에 달한 여류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공개장」이라는 글에서,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아리랑고개가 아니고 무엇이며 당신의 춤이 다름 아닌 우리네의 고민과 동경(憧憬)과의 환상곡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재일 조선인의 희망이었다.
1935년에는 신코 시네마에서 제작한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주연으로 출연,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겼다. 최승희의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5월에는 고치마치구(麴町區) 구단(九段) 1의 3번지에 있는 다이쇼(大正) 빌딩에 집을 마련하고 그 3층에 연구소를 차렸다. 이어 지유게 오카에서 가까운 수기나미 구(杉竝區) 에이후쿠 죠(永福町) 264번지 5백 평의 큰 땅에 새로 집을 짓고 이사했다. 구단사카(九段坂)에 가까운 곳이다.

1936년 10월에는 자택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냈다.
앞의 두 사진은 같은 집을 찍은 것이다. 사진을 보면 주택은 당시 유행하던 모더니즘 주택이다. 그 집은 1940년 미군 공습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최승희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집을 기억할 의미조차 없을 것이다.

1935년 10월 22일 그녀의 공연이 3000석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다. 누구나 꿈꾸는 공연장이었다.
1937년 5월 그녀는 잊혀져 가는 조선예술의 보존을 위해 경성에 자신의 이름을 갖는 ‘최승희극장’을 세우는 꿈을 세우게 된다. 5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가을에 착공한다고 발표했다. 옛날의 종로 경찰서 자리인 종로 3가 땅 6백 평을 사들여 백여 평의 무용극장을 세울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쉽게도 중단된다.(정병호, 앞책, 102-119쪽)  


이어 1937년 최승일이 쓴 『최승희 자서전』 발간 이후 그녀는 무대를 세계로 넓혀 나갔다. 구미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고, 1940년 미국을 비롯한 남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 ‘세계적 무용가’가 되었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전선위문공연을 떠나 조선·만주·중국에서 130여 회에 달하는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이 일로 그녀는 친일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1944년 도쿄로 돌아와 2천 석의 제국극장에서 20일간 24회의 연속 독무공연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기 독무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는 미군의 공습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최승희는 일본을 탈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간다.  

사라진 무용가
해방 후 1946년 5월 29일 그녀는 서울 가회동(嘉會洞) 11번지 자택으로 돌아온다. ‘예술은 서울에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최승희는 1946년 7월 1일 《민주일보》에 귀국 소감을 말하며,

나는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 음악으로 조선의 형과 색을 창조하여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 줄기 영광을 만들려고 애써 왔다. 이것이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내가 조선의 딸로서 걸어왔던 유일한 길이었다.

그녀는 무용가로서 뿐 아니라 일제하의 조선인으로 긍지를 갖고 행동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녀가 살던 가회동 11번지를 찾아 나섰다. 11번지는 현재 ‘북촌 가꾸기’의 핵심지역이다. 11번지는 중앙고등학교와 인촌 김성수 가옥 사이에 있다. 현대건설 사옥을 끼고 올라가면 은행나무가 있고 그 언덕 위로는 중앙고가 있는데 그 입구 왼쪽 일대이다.

가회동에 대한 관심은 『가회동 한옥보존지구 실측조사보고서』(무애건축연구소, 1986.3)가 나온 이후, ‘가회동 11번지 주거계획 건축전시회’가 몇몇 건축가들에 의해 계획된 바 있고(큐레이터; 김광현, 참가건축가: 김인철, 백문기, 우경국, 이종상, 장세양, 조성룡, 1991.6.1-7, 가회동 동사무소), 최근에는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기본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정석, 송인호, 문홍길, 2001.12)  

최승희는 해방 후에도 무용 공연을 하려 애썼으나 여의치 않았다. 숙명여고 강당을 빌려 무용 연습을 하려 했으나 그것도 어려웠다. 그녀는 결국 친일 무용가라는 비판 속에 남편 안막을 따라 1946년 7월 20일 월북한다. 마포, 인천을 거쳐 발동선을 타고 서해안을 따라 올라간 것이다.
북한에 간 최승희는 1946년 평양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 무용 교육에 힘썼다. 전쟁 중인 1950년 말에는 중국으로 가 북경 중앙희극원에서 무용반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55년 북한 인민배우가 되었으나, 1958년 안막이 숙청 당하자 그녀도 숙청 당하게 되었다. 1967년 이후 그녀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000년 8월 20일자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에는 8월 19일부터 간다(神田) 진보죠(神保町)의 이와나미(岩波) 홀에서 후지하라 도모코(藤原智子)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전설의 무희 최승희」가 상영되고 있다는 기사가 났다.
영화는 무용가 김매자(金梅子)가 최승희의 발자취를 찾아 취재하는 형식으로 찍었다고 한다. 최승희를 모델로 그렸던 그림을 찾아 일본 국립 근대미술관과 도쿄화랑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그녀는 세계에 코리아를 알린, 당시로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녀의 이동 공간은 비행기도 없던 시대 전세계에 걸쳐졌다. 그녀의 족적이 다시 살아나길 바랄 뿐이다.

<근대사현장>

<현해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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