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한국인과 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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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한국인과 화병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5.10.1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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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화병은 한국인에게만 있는 병이라고 한다. 나는 일단 이 말 자체를 믿지 못하겠다. 화병은 심리적인 병인데 다른 민족에게 이런 병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한국인에게 좀 더 특징적으로 나타날 수는 있겠다. 화병은 무엇일까? 화병은 왜 생길까? 우리는 정말 화병 환자가 많을까?
 
  화병은 화가 있는 병이다. 그런데 이 화라고 하는 것의 정체도 좀 불분명하다. 화의 한자는 무엇일까? 화는 한자로 보면 두 가지 뜻의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불 화(火)이고, 다른 하나는 재앙의 화(禍)이다. 그런데 화병을 찾아보면 울화병(鬱火病)의 준말로 나온다. 우리말에서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말을 한다.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야말로 울그락 불그락 해진다. 붉어진다는 말은 불의 기운이 되었다는 의미다. 우리말에서 ‘붉다’의 어원은 ‘불’이다.
 
  화기는 주로 양기가 되고, 수기는 주로 음기가 된다. 얼굴이 뜨거워진다면 몸과 정신이 흥분 상태라는 말이 된다. 화가 나지 않았더라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사람에게 불의 기운은 몸의 아래쪽에 있어야 하고 물의 기운은 몸의 위쪽에 있어야 한다. 양기와 음기의 위치가 바뀌면 병이 든다. 그래서 한의학이나 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화기(火氣)를 아래로 보내고 수기(水氣)를 위로 보내려 한다. 단전호흡이나 참선도 비슷한 효과를 갖는다. 호흡을 통해 머리의 뜨거운 기운을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단전호흡을 하면 얼굴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든다. 화가 사라진다.
 
  화병은 화를 내지 못하는 병이다. 화가 나지만, 화가 쳐오르지만 화를 삼키고 화를 내지 못할 때 화병이 생긴다. 답답함이 생긴다. 그야말로 화(火)가 화(禍)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화를 담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화를 담아두지 않으면 어쩔 건가? 해답이 없어 보인다.
 
  화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은 억울함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억울한 건 못 참는다. 잘못을 했고 안 했고 하는 문제는 아니다. 잘못을 했더라도 억울할 수가 있다. 같이 잘못했는데 혼자만 벌을 받는다면 억울할 수 있다. 억울함은 불만이 되고 분노가 된다. 그러곤 어느 순간에 폭발하게 된다. 이럴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 ‘홧김에’이다. 홧김에 무수히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화병도 문제지만 홧김은 더 큰 문제다.
 
  서러움도 화병의 원인이 된다. 서러움은 주로 불평등에서 온다. 운명에 대한 비관에서 온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한탄에서 서러움이 시작된다. 서러움은 자신과 남을 비교할 때 커진다. 행복과 불행은 늘 비교에 있다. 부와 빈의 차이도 비교에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부자들 사이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도 부자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왜 화병이 많을까? 화병에 최악의 처방은 폭발이다. 언제 폭발하는가? 주로 다시 안 만나도 되는 관계에서 화가 폭발한다. 다신 안 보면 그만인 관계에서는 화는 폭발해 버린다. 하지만 다시 만날 사람이라면 화를 폭발시킨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화병은 좋지 않은 거지만, 폭발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우리는 싸우는 사람을 묘사할 때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싸웠다는 말을 한다. 우리는 다시 볼 사람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화병의 해결책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답은 ‘화를 푸는 것’이다. 화는 기본적으로 묶거나 맺지는 않는다. 하지만 종종 맺힌 게 많다는 표현은 한다. 또한 화를 담아둔다는 표현도 한다. 화병의 치료약은 맺히고, 담아있는 것을 푸는 것이다. 마치 이야기보따리를 풀듯이 자신의 억울함이나 서러움을 풀어내야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은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화는 봄눈 녹듯이 사라진다. 우리 민족에게 많다는 화병이 모두 풀리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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