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복궁 집옥재에 모였던 잊혀진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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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경복궁 집옥재에 모였던 잊혀진 근대
  • 노관범 조교수
  • 승인 2015.10.1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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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대한전기협회에서 발행하는 『전기저널』 2015년 7월호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경복궁 유적 발굴 조사 결과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소가 향원지와 영훈당 사이에 세워졌음을 확인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돌아본 것이다. 1879년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한 후 8년이 지나 1887년 조선 경복궁에 처음 전깃불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전등소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복궁의 전등 시설은 동양에 에디슨 제품을 판촉하기 위해 설치된 일류 시설이었는데, 조선 정부가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미국 문물 수용 과정에서 에디슨 전등회사와 교섭한 결과였다. 고종은 자신이 거처하는 건청궁 안팎에 켜진 환한 전등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문으로 번역된 근대 지식

  건청궁 곁에는 고종이 서재 겸 집무실로 쓰던 집옥재가 있었다. 집옥재는 1881년 경복궁 함녕전 별당으로 시작했다가 1891년 건청궁 곁으로 옮겨졌다. 고종은 이곳에 약 4만 권의 책을 보관하고 있었고, 그중에 약 1,400권의 책이 비교적 단기간에 중국에서 집중적으로 들여온 이른바 개화서적이었다. 개화서적은 대개 부국강병에 관한 신서적이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영미 선교사가 영어 원서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들이 많았다.

  중국은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한 북경 함락의 충격을 딛고 양무운동을 개시, 서양 선교사를 고용해 서양서의 번역과 출판에 열심이었다. 1862년 중국 최초의 외국어학교로 시작한 북경 경사동문관에서는 『만국공법』의 저자로 유명한 마틴이 활약하였고, 1865년 중국의 무기공장으로 시작한 상해 강남제조총국의 번역국에서는 『격치휘편』을 통해 중국의 과학 계몽에 힘쓴 프라이어가 활약하였다.

  프라이어가 번역한 서양 과학책은 조선의 지대한 관심을 받아 속속 집옥재로 유입되었다. 물리학의 기본인 역학을 다룬 『중학도설(重學圖說)』(1885년), 전기의 발생 원리와 전기 기구를 다룬 『전학도설(電學圖說)』(1887년)이 집옥재에 들어왔다. 화학 개론서라 이를만한 『화학감원(化學鑑原)』(1872년)에는 화학 원소가 도표로 잘 정리되었다.

  산소의 경우 Oxygen(서양 이름), O(서양 부호), 8(분제), 養氣(중국 이름)라는 정보가, 수소의 경우 Hydrogen(서양 이름), H(서양 부호), 1(분제), 輕氣(중국 이름)라는 정보가 수록되었다. 물리학, 전자기학, 화학에 관한 기본 지식을 한문으로 읽었을 중국과 조선 사람들의 한문 실력을 상상해 보라! 한문은 전통의 문장인 동시에 근대의 문장이었다.

  프라이어는 근대 국가 부강의 두 물질적 기초인 석탄과 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영국인 스미스가 지은 『Coal and Coal Mining』을 『개매요법』(1871년)으로 번역했고, 산업혁명의 본고장 영국의 제철, 제강 등 각종 공장을 취재한 보고서를 『역람기략』(1881년)으로 출판했다. 조선 정부는 『개매요법』과 『역람기략』을 수입하였는데, 특히 프라이어의 영국 공장 취재 보고서는 『한성순보』에 전재하여 전국에 알렸다.

한문 근대, 일문 근대와 영문 근대에 밀려나

  조선 정부는 영국의 근대 공장은 물론 영국의 근대 경제학에 관한 책도 입수하였다. 이번에는 상해가 아니라 북경이었다. 마틴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 교수 포셋의 저서 『Manual of Political Economy』의 번역을 경사동문관 부교습 왕봉조에게 의뢰하여 『부국책』(1882년)을 펴냈다. 『부국책』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서양 근대 경제학을 활용해 중국의 재원을 널리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영국 근대 케임브리지 경제학은 『부국책』을 통해 조선에 도착하였다.

  위에서 거론한 책들은 집옥재 개화서적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초기 조선에 유입된 한문 개화서적은 지금 대부분 잊혀져 버렸다. 20세기 한국 사회는 자신의 근대를 일본-미국 패러다임 속에서 구축하였고, 그렇게 구축된 일문 근대와 영문 근대의 지적 프레임은 조선의 한문 근대 지식을 망각에 가두었다.

  오늘부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는 중국본 도서를 중심으로 〈규장각, 세계의 지식을 품다〉라는 이름의 특별전시회가 석 달간 열린다. 경복궁 집옥재에 모였던 잊혀진 근대도 이번에 새롭게 소환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그 밖에 많은 책이 출품된다. 바둑을 사랑하는 애기가라면 전시품 중에서 『주난여선생위기보(周嬾予先生圍碁譜)』의 감상을 권한다. 17세기 중국 바둑의 정수와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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