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17. "육개장 맛이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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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17. "육개장 맛이 달라요…"
  •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 승인 2015.10.0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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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전 맨해튼한국학교장
  “죄송합니다. 개나리 반(기초1반)은 정원이 차서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한국학교에 꼭 입학하고 싶은데요.”
  “진달래 반(기초2반)은 20명 넘게 신청을 해서 한 반을 더 만들었습니다. 일단 진달래 반으로 넣으시고 혹시 개나리 반에 결원이 생기면 그 때 옮겨드릴 수는 있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라도 해주십시오.”
 
  이번 학기도 유치반은 포화상태이다. 그러나 반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학생 수는 줄어든다. 그 감소는 7, 8단계인 고급반에선 더욱 심해져, 학생 분포도를 그려보면 피라미드 모형처럼 위로 올라갈수록 급격한 감소를 보인다.​
 
  한국학교 교장이 되고 가장 먼저 눈에 띈 심각한 현상은 고급반 학생의 급감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별 거부감 없이 학교에 오지만, 나이가 들수록 한국어 배우기를 싫어하고 운동이나 음악 등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의지가 반영되면서 한국학교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중학생이 되면 특목고 입시를 위해 학원에 가야 하므로 그 숫자는 더욱 줄어든다. 학부모는 자녀와 한국말로 일상대화가 되는 것에 만족하고 한국학교를 포기하지만, 솔직히 고급반이라 해도 실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땅을 샀어요’의 뜻은 알지만 ‘대지를 구입했어요’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니 8단계를 마쳤다고 해도 이제 겨우 산 하나를 넘은 것이건만 4, 5단계를 끝으로 그만두는 학생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위해선 한국어보다 영어, 수학이 더 급선무인 것을 어쩌랴. 그러니 고급반 위의 단계로 ‘SATII 한국어반’을 만고 싶은 나의 바람은 먼 세상 일이 되고, 고급반이나마 살려내야 한다는 절실함이 차오른다.

  ‘한국학교를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다니게 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뿌리 교육재단’의 모국 방문 연수생을 선발하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우리 아이들도 이런 연수에 참여하면 교실에서 몇 년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한국을 느낄 텐데... 개인이 아니라 단체로 가면 더 좋겠지? 그래, ‘졸업여행’을 만들면 되겠다... 졸업생들 격려도 되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아이들도 모국방문의 목표가 생기며, 꾸준히 학교를 다닐 테니 고급반 급감 사태는 자연히 해결되겠지? 동시에 한국과 한국어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오면 ‘SATII 한국어반’ 신설도 가능해질 거야. 와아~ 졸업여행 하나로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네. 이거야 말로 일석이조,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긴데...‘

  “때르릉, 때르릉...”

  현실성 없는 혼자만의 망상을 깨우기라도 하듯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다. ‘그래, 졸업여행을 가려면 최소한 만 달러는 필요할 텐데 어디서 그 돈을 구하겠어...’ 잠시 구름 위에서 분홍빛 꿈을 꾸다 떨어진 기분으로 전화기를 든다.
 
  “교장선생님, 이번에 ‘교육재단’에서 2세들을 위한 ‘모국방문’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조언과 좋은 자료도 좀 부탁합니다...”

  우리 학교를 세운 뉴욕한인경제인협회(이하 경협)의 ‘교육재단’측 전화다.

  “네에, 마침 저에게 좋은 자료가 있습니다. 검토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순간, 단어 하나가 섬광처럼 떠오른다. ‘졸업여행!’...‘그래, ‘경협 모국 방문사업’을 ‘맨해튼한국학교 졸업여행’으로 하는 거야...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꼭 성사시켜야 해...’ 학교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언젠가는 2세들을 위한 모국방문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꿈이 성큼 다가온 것 같은 설레임으로 ‘졸업여행’ 추진을 위한 나의 머리와 마음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육재단 이사회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 ‘기획안’을 들고 찾아갔다.
 
  “...... 이상이 졸업여행으로 고급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었습니다. 다음은 ‘SATII 한국어 반 신설’입니다. 이 반은 한국어 공부 외 후배들을 위한 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졸업여행의 효과로 이 반이 운영되면, 동문의 결속력이 강해지고 나아가 미국 내 ‘한국 커뮤니티’의 성장에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이사님들께서 20여 년 동안 키워온 학교가 200년을 향한 청사진을 그리는데 아낌없는 후원을 바랍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학교 발전을 위한 일에 힘을 모아봅시다. 오늘은 졸업여행 건을 실시하는 것으로 의결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 이사회에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품고만 있던 꿈이 이렇듯 빨리 실현된다는 감격에 목이 매인다. 그러나... 2차 이사회 결과, 선발 대상을 11, 12학년에 국한시켰다. 너무 어린 학생들은 안전사고 등 보호에 문제가 많이 생길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학교 졸업반은 대부분 7, 8학년인데...’ 다시 경협을 찾아가 설득을 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같이 공부한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기에 서로 도우며 잘 적응 할 것입니다. 이미 졸업한 학생을 보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학교 발전에 더욱 큰 효 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당해년도 졸업생의 여행입니다. ‘졸업여행’의 그 상징적인 의미 가 잘 시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드디어 허락이 떨어지고 졸업여행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 대학과 연계하여 프로그램을 마련하고자 할 즈음, 한 통의 팩스를 받게 되었다. “한민족 리더쉽 캠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포 후세들과 대한민국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고 서로 우정을 나눔으로써 세계화 시대에 발맞춘 인적 연결망을 형성하는 의미 있고 풍성한 행사이다. 프로그램도 한국어, 역사문화교육 외 각종 대회, 유적지, 산업시설 견학, 해병대 훈련 등 우리 아이들만 달랑 연수받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알찼다. 

  그러나 ‘기간’이 문제였다. 우리가 계획했던 기간은 2주였는데 한민족캠프는 ‘한 달’이다. 학부모님들도 불안해 하셨고, 마냥 좋아하던 학생들도 ‘한 달’이라는 소리를 듣자 주춤 발을 뺀다. 모국을 더욱 다양하고 깊게 체험하고, 세계 각지에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설득이 시작됐다....

  학부모님이 하나씩 승낙을 하면서 이제 졸업여행 준비는 어떤 걸림돌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침 한민족 캠프 ‘뉴욕지부’까지 있어 담당자의 구체적인 도움을 받으며 더욱 순항을 했다. 이제 내일이면 ‘한민족캠프’를 향해, ‘맨해튼한국학교 졸업여행’의 첫 테이프를 끊으며 졸업생들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
 
  덜커덕 겁이 났다. 아이들을 배웅하러 나간 공항에서 기념사진 찍는 것도 잊을 만큼 내 마음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제야 한 달이라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생각도 들었고, ‘의욕만 앞서 무모한 짓을 한 것은 아닌가?’란 후회가 밀려왔다.

  ‘경협 이사님들 말씀이 옳았어. 그래, 먼 여행을 하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어려... 행여 아이들이 탄 비행기가 사고라도 난다면? 혹 캠프에서 훈련을 받다 다치는 것은 아닐까? 낯선 곳에 가서 병이라도 나면 어쩌지? 예전 어떤 캠프에선 남녀 학생 사이에 불미스런 일도 발생했다고 들었는데...’

  무지갯빛 꿈을 갖고 신이 나서 일을 추진할 때와는 달리, 막상 아이들이 떠나게 되자 온갖 나쁜 생각은 다 몰려들며 좌불안석이 되었다. 물론 보험도 다 들었고, 혹 불상사가 일어나도 주최 측이나 학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보호자 각서도 받아 놓았지만 그런 법률적 보호 장치나 서류가 해결해 줄 불안이 아니었다. 한국어 향상, 문화체험, 정체성 확립 등의 거창한 목표는 이미 사라졌고,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만 와준다면 아무 원이 없을 정도의 ‘간절함’이 매 순간의 기도로 이어졌다.​
 
  ‘무심한 놈들, 잘 있다는 전화 좀 주면 손가락뼈가 부러지나?’

  학부모를 통해 아이들이 잘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지만 연락 한 번 주지 않는 아이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교장 선생님, 유미예요...”

  캠프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가장 상급생인 유미한테 전화가 왔다.

  “응, 유미구나. 잘 지내고 있니?”
  “네, 다른 애들은 모두 개인으로 왔는데, 우리는 단체로 와서 다들 부러워해요. 서로 도 우며 잘 지내고 있어요.”
  “많이 배웠니? 힘든 점은 없어?”
  “네, 선생님은 우리들 한국어 실력 낮다고 걱정하셨지만 우리가 제일 잘해서 맨해튼한국 학교가 유명해졌어요. 그리고 저 ‘말하기 대회’에서 1등 했어요. 상품이 인절미예요. 지금 애들과 나눠먹고 있어요. 모두 먹어 본 떡 중에 제일 맛있데요.”

  “선생니임~~”
  “응, 영미구나... 잘 배우고 있니? 어디가 제일 좋았어?”
  “무령왕릉이요. 미국엔 없는 것이잖아요. 무덤에 가득 넣은 유물도 봤어요... 선생님! 그 무덤을 525년에 만들었대요. 그 때 미국은 있지도 않을 때인데...”

  학생의 입을 통해 듣는 ‘무령왕릉’을 본 감격... 연도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그 아이의 머리와 가슴엔 무엇이 담겨있을까? ​
 
  “엄마, 한국에서 먹던 육개장과 뉴욕에서 먹는 육개장 맛이 달라요. 한국 육개장이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좀 덜 맵고...”
 
 
  교장 선생님, 며칠 전 영미가 저에게 한 말입니다. 영미가 한국음식의 미묘한 맛의 차이 를 이야기하다니... 평소에는 한국에 대한 말만 해도 머리를 저으며 시큰둥했던 아이가 마 음의 문을 열고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돌아온 것이지요... 영미에게 나타난 변화는 이 것만이 아닙니다. 우선 자신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고, 그래서 앞 으로 한국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답니다.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눌 때도 많습니다. 머리로만 배우던 한국이, 직접 땅을 밟고 보며, 체험을 통해 가슴으로 느껴진 것이지요. 이 전과 달리, 영미와 이야기할 때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낍니다. “엄마! 생각 날 때 마다 조금씩 조금씩 얘기할게요...” 아이의 마음속에 엄마와 나누고 싶은 뭔가가 가득 들어 있다는 느낌. 그것이 주는 기쁨이 저의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채워주고 있답니다...
 
 
  영미 어머님이 영미의 한국방문 이후의 변화에 감격해 하며, 내게 편지도 보내주시고 학교 누리집에도 올린 글을 요약한 내용이다. 무사히 돌아만 와준다면 원이 없을 것 같았던 아이들이 가슴에 보석을 심어왔다는 사실에 감격 같은 눈물이 흐른다. 그동안의 마음 졸임을 씻어 내리기라도 하듯...
 
  졸업생의 무사 귀환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하고 감격스런 여름이 가고, 새 학기가 열렸다. 반 하나가 더 생겼다. ‘SATII 한국어’반이다. 졸업생 모두가 등록을 하진 못했지만 반 이상이 등록을 했고, 부모님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희망 의지로 결정한 것이다. 1·2·3교시 한국어 공부를 끝내고, 4·5교시에는 실력이 부족한 후배의 개인 교습을 하고, 태권도와 무용을 하는 유치반 동생들도 보살펴 준다.

  유미는 개나리 반 ‘보조 교사’가 되어 병아리 같은 동생들에게 사랑을 듬뿍 쏟아준다. 지각이 잦던 유미였지만 일찍 와서 후배들을 맞고, 학교만 오면 항상 입이 부어있던 영미는 언제 그랬냐는 둥 환한 웃음으로 학교를 밝힌다. 수줍음 많던 미리는 후배들을 가르치며 적극적이고 활발한 선배로 바뀌었고, 개인 지도를 하는 준호가 말을 안 듣는다고 힘들어하면서도 후배 가르치는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민규, 특별교실로 동생들을 인솔할 때면 작은 키도 커 보이는 의젓한 성민이, 깍쟁이 같은 희진이도 유치부 아이들 고사리 손을 잡고 화장실에 데려다 줄 때는 엄마처럼 푸근해 보인다...
 
  하교 후 늦게 데리러 오는 학부모를 대신해 후배들과 놀아주는 자상한 선배들 모습 위로 반짝이는 가을 햇살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사랑과 우정이 가득한 공간, 뿌리 깊은 푸른 나무들을 축복하듯이.
 
 
  * 위의 글은 ‘경희사이버대학교’에서 개최한 ‘한국어 및 한국문화 교육사례 공모전’ 수상작(장려상, 2008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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