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첫 박사학위, 정승 씨 '10년 형설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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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첫 박사학위, 정승 씨 '10년 형설지공'
  • 모스크바 겨레일보
  • 승인 2003.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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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세월 러시아의 그 모진 강추위도 형설의 공을 막지 못했다. '왜 미국으로 안가고...'라는 미 우월주의를 뒤로 하고 고교과정부터 러시아 학생들과 어울려 경쟁하며 우수논문상을 비롯 남다른 실험정신 그리고 이를 통해 '박막가공을 통한 평면안테나'라는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내 결국 러시아유학의 선구자적 정신이 오히려 값진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편집자 주>

<겨레일보 www.koreans.ru> 올 2003년 최초의 박사학위는 10년 형설의 공을 쌓은 정승(25세)씨가 받았다. 지난 15일 정승 씨는 <금속합금대학>에서 열린 '평면외부안테나'에 관한 자신의 논문방어에서 19명 심사위원 전원 찬성으로 통과됨으로 해서 93년부터 모스크바 '쉬콜라'(1084학교)에서부터 시작한 기나긴 학업의 여정을 일단락했다.

정승 씨의 논문은 세계적으로 '박막가공'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없는 상황에서 다양한 접근방식을 보이고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위성안테나'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논문방어에서 공젹자들의 흥미로움까지 자아냈다. 그는 이미 한국의 <KIST>에서 티탄과 마그네슘의 분말합성을 한달만에 최초로 성공함으로써 리튬전지의 수명을 4배까지 끌어올리는 실험에도 앞장섰다.

올해 그동안 발표한 우수 논문으로 1월 17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레올로기> 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된 것은 물론 <쿠즈네츠 아카데미>에서도 오는 2월 13일 정회원으로 들어가게 예정되어 있어 한국인의 우수한 두뇌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93년 러시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그로서는 벌써 그야말로 강산이 변하는 10년 세월이 훌떡 지나가 버린 것. 2003년 박사 '자쉬타'를 끝낸 정승 씨를 만나보았다.
그는 모스크바 1084학교에 편입했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처음 쉬콜라 10학년 2학기 과정에 들어갔을 때 러시아어가 안돼 영어로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이를 보더니 모두다 낙제를 시켜버리겠다고 했어요. 그후부터는 수학 물리 컴퓨터 등 언어가 필요없는 항목들은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나머지 인문 계열은 러시아어로 도움을 받으며 전적으로 러시아어로 공부를 했지요. 11학년 때부터는 거의 정상적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물리 화학 수학 러시아어 영어 등 5개과목에 대해 과외를 받았습니다. 시간당 5불씩 준 것 같습니다. 보통 러시아 학교는 11학년에 대학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우리학교는 신설학교라 계열 구분이 없었습니다.

음식이야 러시아친구들과 같이 지내다보니 러시아식으로 먹었지요. 부모님들이 몇번 기숙사에 온 것 말고는 러시아친구들과 거의 같이 지냈지요."

이렇게 짧은 기간동안 러시아에서 현지 러시아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마지막 학창생활을 한 그는 대학선택에 있어 한바탕 고민을 한다.

"대학을 택할 때는 고민을 좀 했죠. 한국에 고등학교를 다닐 때 적성검사표에서 문과 이과 양쪽이 고르게 나왔습니다. 당시 한국사람에게 잘 알려진 학교로는 므기모와 바우만 그리고 엠게우가 있었습니다. 바우만은 핵심학과는 공개를 하지 않았으며 엠게우는 기초과학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속합금대학>의 경우 당시 유네스코선정 세계순위 3위로 학교도 괜잖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고 해서 이 학교를 택했지요.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이 학교는 정부로부터 은 1톤에서 3톤 금은 100킬로에서 200킬로까지 그리고 그외 모든 원소를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모든 자료가 풍부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소재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자료가 쌓여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98년부터 2000년까지 <나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다면 러시아에서는 이미 1960년대 그 개념이 나왔습니다.

입학할 당시는 같은 과 동기가 35명이었으나 졸업할 당시는 13명(3명은 선배)에 불과 졸업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학생들끼리 학술교류가 있었는데 우수논문상으로 3등을 했는데 돌아와서 선배들에게 크게 혼났습니다. 2000년도에는 2등을 했고 그래도 선배들은 만족을 못했습니다. 2001년 11월에는 러시아항공학회에서 우수논문상을 수상했으며 바로 그전 10월에는 국제학술대회에서 외국인 우수논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과학분야에 있어서 한국과 러시아는 긴밀히 협력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나라 제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최신 논문을 찾기가 힘들고 아직은 러시아어에서 한국어로 직번역되는 것이 적다는 것입니다. 또 러시아에서는 실험체계가 아직 완전히 전자식이 아니어서 실험에 있어 어떤 알고리듬에 의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버튼만 누르면 결과가 나와 버립니다. 그래서 서로 실험접근방법이 틀린 양쪽을 합쳐 놓으면 참 좋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0년 세월 학위취득의 공을 제일 먼저 그는 모스크바에서 사업을 하면서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돌리고 있다. 자신도 논문방어를 치르느라 입술근처가 부르틀 정도로 고생했으나 이제는 함박웃음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한러 기술협력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의지를 보이면서...***  
DATE: 200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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