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 칼럼] 품격 없이는 인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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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대 칼럼] 품격 없이는 인격도 없다
  • 신성대 대표
  • 승인 2015.09.1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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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은 신사의 기본 매너

 

▲ 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및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장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한복음> 21장 7절.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에게로 가기 위해 벗어두었던 겉옷을 입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예수에게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깊이 생각지 않고 그냥 넘겨 버린다. 아니, 바다로 뛰어들려면 입었던 옷도 벗을 일인데, 왜 도로 걸쳐 입었을까?
 
이런 저런 공적 행사를 위해 동포들의 고국 방문이 잦아지고 있다. 한데 그 중에는 공적 모임에는 어울리지 않는 편한 복장을 한 분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띈다. 나름 성공한 분들일 테지만 아마도 현지 주류사회에는 들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언제나 그렇듯 한국은 하드웨어[物格]보다 소프트웨어[人格]가 문제다. 교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품격이 곧 한국의 국격이다.
 
정장을 차려 입고 에티켓을 지키며 고품격 매너를 갖추는 것을 지레 자신에 대한 구속이나 허세로 여기는 것은 오해다. 이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인간 존엄의 실현이다. 아무렇게나 차려입고 흐물흐물 행동하며 예술하는 사람이니까, 글 쓰는 사람이니까, 운동하는 사람이니까, 투쟁하는 사람이니까, 노동자이니까, 무직자이니까… 핑계 대는 저변엔 나태함과 자유인인양 하는 촌티가 깔려있다 하겠다.
 
피터 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재작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미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로스앤젤레스 폴 게티미술관에 들러 피터 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을 감상하고 왔다. 그는 과연 그 그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한복 입은 남자>를 두고, 모델이 남자가 과연 조선인인가? 배를 타고 온 <베니스의 개성상인> 안토니오 코레아가 아닐까? 등 확인된 것은 없다. 임진왜란 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17년 로마에서 일 할 때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에 루벤스가 제목이나 설명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1935년 영국의 미술사학자가 그림 주인공의 의복과 머리장식을 보고 ‘A Man in Korean Costume’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아무튼 인상이나 의복, 양손을 소매 속에 낀 자세가 한국인에게 매우 익숙하고, 상투 모양이 좀 어색하긴 해도 탕건(宕巾)은 영락없는 조선인의 그것이라 하겠다. 옷은 그곳까지 가는 도중 몇 차례 현지에서 만들어 입었을 것이고 그 바람에 조금씩 형태가 변했을 것이다.
 
헌데 그가 어떤 연유로 그 시대에 이탈리아까지 가게 되었으며 폴 루벤스의 눈에 띄었을까? 게다가 조선인이 그곳에 갈 때까지는 꽤 긴 시일이 걸리는 것은 물론 여러 나라를 거치며 숱한 곡절을 겪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조선의 복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을까?
 
그림에서 주인공의 풍모는 당당하다. 따라서 그가 단순한 노예나 막노동 선원 신분으로 그곳까지 끌려간 상민은 분명 아니고 중인 이상의 조선 선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상민이었다면 굳이 그곳까지 가는 동안 그 복장을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복장으론 남의 집 하인 노릇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분명 그는 그곳에서도 상류층 집안에 빈객으로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며, 루벤스의 눈에 띄어 그의 호기심을 유발할 만큼의 매력을 지녔기에 초상을 남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리라. 다시 말하자면 조선 선비의 품격이 당시 이탈리아 상류층에서도 존중받았다는 뜻이다.
 
중국 황제까지 감동시킨 조선 선비의 글로벌 품격
 
조선 성종 18년(1487) 최부(崔溥)가 제주도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발령 받아 부임하였다. 이듬해 부친의 부음을 듣고 나주로 돌아오던 중 제주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국 절강성 영파부(寧波府) 연해에 도착하였다. 최부 일행은 해적을 만나 도망을 치고, 왜구라는 의심을 받아 체포 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었지만 간신히 혐의에서 풀려났다.
 
이후 일행은 중국 군리(軍吏)의 호송을 받아 항주(杭州)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도착하였다. 북경에서 명 황제 홍치제(弘治帝)를 알현하고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돌아왔다. 최부가 한양에 도착하자 호기심을 느낀 성종은 약 6개월간의 그가 겪은 중국 견문을 저술해 바치도록 했다. 명에 따라 그는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면서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을 완성하여 바친 다음 곧장 고향인 나주로 내려가 부친상을 당한지 반년 만에 비로소 집상하였다.
 
이처럼 그 옛날에는 풍랑을 만나 배가 중국이나 유구(지금의 오키나와)로 표류했다가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헌데 최부는 어떻게 해서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그는 미관말직에 불과한 조선 관리였다. 영파부사는 그와 일행을 조선으로 가는 다른 배를 알선해 돌려보내버리면 그만인 것을 왜 황제에게 보고하여 굳이 그를 북경으로 보내어 알현케 했을까?
 
한데 최부는 그 6개월 내내 상중이라 하여 단 하루도 상복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곡(哭)을 하며 근신했다고 한다. 단지 황제를 알현할 때만 잠시 고집을 꺾고 예복으로 바꿔입었을 뿐이다. 아무렴 영파부사도 생사를 넘나드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 고집스러운 조선 선비의 예의범절과 효심에 감복하여 모범케이스로 황제에게 보고를 하였으며, 역시 그 기특한 소식에 호기심이 생긴 황제가 직접 그를 만나보고자 북경으로 불러 선물까지 내려준 것이겠다. 지금으로 치면 조난당해 표류했다가 중국 지도부에까지 보고되어 시진핑 주석까지 만나고 온 셈이니 아무렴 대단한 일이다.
 
정장은 인격의 표현이다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떠난 이준 열사가 헤이그로 가는 중간 경유 겸 막후교섭지로 제정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잠시 머물렀다. 당시 현지신문 상류층파티 동정란 기사에 ‘처음에는 아프리카 무당 샤먼과 같은, 검은 갓에 흰 두루마기 차림의 조선 선비의 느닷없는 출현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는데, 점차 그의 원숙하고 품위 있는 사회적인 인격체 풍모에 매료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경청하게 되었고, 결국 상당수 인사들이 조선의 처지를 이해 공감하게 되어 필요한지지 활동을 베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실렸었다.
 
물론 이준 열사가 헤이그까지 그 차림으로 가지는 않았다. 주목을 끌기 위해 계획된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매너가 곧 인격. 심지어 이국만리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고 회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가 곧 매너임을 증명해준 사례라 하겠다.
 
명가(名家)! 고품격 가풍을 가진 집안들을 보면 대부분 잘 산다. 이런 가문은 설사 가세가 기울어 어려움에 처해도 쉽게 포기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빠르게 회복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사소하다 무시하지 말고 남다른, 남보다 우월할 수 있는, 자기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는 매너로 품격을 갖추는 것, 그런 게 진정한 지혜라 하겠다.
 
맹자는 “사람은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야 남에게서 모욕을 당하고, 나라도 스스로 해친 뒤에야 남의 손에 망하게 된다. 夫人必自侮然後人侮之, 國必自伐而後人伐之”고 했다. 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무례하다고 욕하지만 자기를 함부로 하는 사람을 우리는 천박하다고 한다. 정장 매너는 가장 기초적인 자기존중이자 상대에 대한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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