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의 헤이그 밀사’ 헐버트 박사 서거 66주기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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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헤이그 밀사’ 헐버트 박사 서거 66주기 추모식
  • 허겸 기자
  • 승인 2015.08.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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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의 헤이그 밀사’로 불리는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의 서거 66주기 추모식이 12일 오전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 주최, 국가보훈처 등의 후원으로 거행됐다.(사진=이형모 본지 발행인)

  헐버트, 1882년 체결 ‘조미수호통상조약’ 배신하고 을사늑약 눈감아준 미국 비판
  대한제국의 독립 호소하다 1949년 한국 땅에 묻힌 미국인 선교사의 피맺힌 절규
  최초 근대식 한글 교과서 집필… 서재필 선생 도와 ‘독립신문’ 영문판 발간하기도
  기념사업회, 헤이그특사증 전달 경로 공개… 고종황제→헐버트→이회영→이상설

▲ 김동진 기념사업회장(사진=이형모 발행인)
  고종 황제의 ‘헤이그 밀사’ 파견을 막후에서 강력하게 지원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다 한국 땅에 묻힌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의 서거 66주기 추모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는 12일 오전 11시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백주년선교기념관에서 헐버트 박사의 추모식을 갖고,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고인의 살아 생전 발자취를 기억하고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에는 66주기를 기념해 센트럴 미시간대의 호프 E 메이(Hope Elizabeth May) 교수 겸 변호사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 과정에서 헐버트 박사가 한-미 양국에 건네준 교훈을 미국인으로서 강연해 주목을 받았다.

  메이 교수는 특강에 앞서 “같은 미국인으로서 헐버트 선교사가 한국의 독립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보여준 영웅적 삶에 긍지를 갖고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지난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를 예시하며 “제3국이 한국에게 부당하거나 강압적인 행위를 할 때 미국은 ‘도움을 주고 보호(render assistance and protection)’했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러질 못했다”고 지적했다.

  1905년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이에 격분한 고종 황제는 그해 10월 헐버트 박사를 미국에 밀사로 보내 친서를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테오도어 루즈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고종 황제의 친서 접수를 거부한 데 이어 재외공관 철수를 명령, 미국은 을사늑약 발표 직후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한 열강 국가로 오점을 남기게 됐다.

▲ 고종 황제의 전보(사진=기념사업회)
  자신의 조국인 미국이 국제법을 어기고 대한제국의 국권침탈을 외면한 사실에 비분강개했던 헐버트 박사는 백악관과 국무성을 방문,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미 행정부의 벽은 높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전달하려던 그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눈물을 머금고 이듬해 한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는 당시 헐버트 박사가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할 때 지참했던 고종 황제의 전보가 보관돼 있다. 영문으로 기입된 이 전보에는 ‘나는 을사늑약을 승인하지 않았소. 조약은 무효이니 미국을 설득하기 바라오’라는 고종 황제의 회한 섞인 심정이 기술돼 있다. 이 전보는 국제법상 을사늑약이 불법이고 원인 무효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인정되고 있다.

  호프 E 메이 교수는 추모식 특강에서 헐버트 박사로부터 얻은 교훈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가 `진정한 애국심의 가치(Value of True Patriotism)’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줬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메이 교수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조국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하고 그 잘못에 대해 용기 있게 세상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애국심”이라며 “헐버트 박사는 자신의 조국인 미국이 잘못했다고 폭로하고 비판했다”고 했다.

▲ 호프 E 메이 교수는 강연에서 “헐버트 박사는 `진정한 애국심의 가치’를 보여준 애국자”라고 말했다.(사진=기념사업회)
  또한 “추모행사를 통해 헐버트의 정신을 떠올릴 수 없다면 역사의 망각에 빠져 헐버트 같은 애국자들이 용감히 쌓아 올린 위대한 업적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며 헐버트 박사의 공적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한다고 당부했다.

  기념사업회는 66주기를 기념해 헐버트 박사가 지난 1949년 7월 29일 40년 만에 86세의 나이로 한국에 환국한 뒤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1주일 만에 서거해 양화진에 묻히는 과정을 담은 한국 언론보도들을 발굴, 이번에 공개했다. 사업회는 당시 신문보도들을 통해 대통령, 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한국 국민들이 헐버트 박사의 한국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 올해 66주기를 맞이한 추모식에서는 각계 각층 인사들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로버트 오그번 주한미대사관 공보참사관,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박홍섭 마포구청장, 황인자 새누리당 국회의원(사진=이형모 발행인)
  ‘삼천만의 애끓는 통곡’ 등의 제목이 달린 신문보도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조사를 통해 “몸만 미국인이지 마음은 한국인이었던 헐버트 박사의 유지를 계승해 그의 공을 영원히 빛나게 하자”고 애도의 뜻을 밝혔다. 이시영 부통령은 “헐버트 박사는 불멸의 한국 은인”이라며 “우리는 은인을, 아니 애국자를 잃었다”고 비통한 심경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사업회는 언론보도를 분석한 결과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 밀사 파견의 중심 역할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이시영 부통령의 증언을 확보했다. 이 부통령은 실제 파견이 되기 1년 전인 1906년부터 헐버트 박사가 이상설, 이회영 선생과 함께 헤이그 밀사를 계획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헐버트 박사에게 위임한 고종 황제의 헤이그특사증이 `1906년 6월22일’자로 돼 있는 사실과 일치한다. 사업회는 “이 부통령은 이회영 선생의 친동생으로, 형의 행적을 직접 보고 들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진실성과 객관성이 높은 증언”이라고 설명했다.

▲ 호머 헐버트 박사의 40년 만의 방한과 서거, 영결식에 대해 대서특필했던 당시 한국의 신문들.(사진=기념사업회)
  그동안 다양한 설들이 난무했던 헤이그특사증의 전달 경로도 이번에 새롭게 발견됐다. 사업회가 공개한 이시영 부통령의 증언에 따르면 특사증은 고종 황제로부터 헐버트 박사가 직접 받아 이회영 선생을 거쳐 이상설 밀사에게 전달됐다. 헐버트 박사가 고종 황제에게서 직접 특사증을 수령했다는 사실은 헐버트 박사의 손자의 증언과 일치했다.

  이밖에 헐버트 박사가 별세하기 전에 이준 열사의 유족 중 딸의 요청으로 병상에서 면담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이상설 밀사의 블라디보스토크 활동 등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이시영 부통령의 증언도 확보했다고 사업회는 밝혔다. 이와 함께 헐버트 박사를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에 국빈 초청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비행기 표를 마련할 정부 재원이 없어 86세 노인을 배편으로 힘든 여행을 하시게 했다”며 안타까워한 사연이 공개되기도 했다. 이는 이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 씨가 시어머니로부터 들은 전언이다. 

▲ 헐버트 박사 묘소를 참배한 정의화 국회의장, 김동진 회장 및 사업회 주요 인사들.(사진=기념사업회)
  이에 앞서 정의화 국회의장은 헐버트 박사 묘소를 참배하고 “참으로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송구스럽다”면서 “`보은의 국가’라는 대한민국이 헐버트 박사의 사랑과 은혜로운 일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기억하고 민족의 사표로 삼지 못했음을 깊이 반성한다”고 방명록에 기록했다.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이날 추모사에서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박사의 영전에 한없는 존경심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빈다”며 “광복 70주년을 맞아, 헐버트 박사께서 보여준 시대를 초월하는 나라사랑과 박애주의, 정의에 대한 신념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 헐버트 박사 66주기 추모식 행사장 전경.(사진=이형모 발행인)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은 “헐버트 박사는 3000만 겨레의 존경과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존재는 물론 업적조차 잊혀져버렸다”면서 “한국 정부는 만시지탄이나마 기념사업회와 한글학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지난해 한글날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며 헐버트 박사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사명감을 느끼고 더욱 애쓸 뜻을 밝혔다.

  올해 66주기 추모식은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유공자유족회, 마포구청이 후원했으며 정의화 국회의장 등이 묘소를 참배한 데 이어 황인자 새누리당 국회의원,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박유철 광복회장, 김선도 국가원로회의 공동의장, 안창원 서울YMCA 회장, 박홍섭 마포구청장, 여우훈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감독, 이형모 본지 발행인,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입양된 재외동포인 로버트 오그번(Robert Ogburn) 주한미국대사관 공보참사관 등이 추모식에 참석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호머 헐버트(1863~1949)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시에서 목사이자 미들베리대학 총장을 지낸 아버지와 다트머스 대학 창립자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1863년 1월26일 3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라는 가훈 속에서 성장한 헐버트는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명문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학 2학년 재학 중, 우리나라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7월4일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글을 열심히 공부하며 1889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했다. 그는 한글 사용 운동에 앞장섰으며 한글의 위대성을 국제적으로 소개했다.

  1891년 말 육영공원 교사 계약이 끝나고 미국에 돌아간 후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해 선교사, 출판인, 언론인으로 크게 활동했다. 1896년 우리의 정신적 혼인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오선지에 채보했고, 서재필 선생을 도와 ‘독립신문’ 창간에 이바지했다. 1897년 한상사범학교 교장, 대한제국 교육 고문, 1900년 관립중학교 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1903년 YMCA 창립준비위원장, 창립총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청년들을 계몽시키고자 YMCA를 태동시켰다. 1905년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1906년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 불후의 명저를 출간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 세계에 알렸다. 1905년 고종 황제 특사로 미국을 방문, 을사늑약을 저지코자 맹활약했다. 1906년 대한제국 조약 상대국 국가원수를 방문하는 헤이그 특사로 임명됐다.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를 방문, 일본의 침략주의를 규탄하는 등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07년 일제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면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전 세계에 호소했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86살의 노구를 이끌고 40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았으나 노환과 여독으로 도착 1주일만인 1949년 8월 영면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평소의 염원이 극적으로 이루어져 그는 지금 마포나루 양화진에 한강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다.[‘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김동진 著.도서출판 참좋은친구 刊.2010년) 서문 발췌] 

  김동진 기념사업회장은…

  국제금융인이자 헐버트 연구가. 1989년 케미칼은행의 뉴욕 본사에 근무하던 중 헐버트의 맏손자를 극적으로 만나면서 헐버트 연구에 박차를 가해 왔다. 헐버트의 삶이야말로 우리 청소년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의 삶이라는 확신 속에서 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해 헐버트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고, 헐버트 후손을 한국에 초청하는 등 헐버트 기념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체이스맨해튼은행 한국 대표, 제이피모간체이스은행 한국 회장, PCA투신운용㈜ 대표이사를 역임하는 등 30여 년간 국제 금융인으로 일하고 있다. 
 


  허겸 기자  khur@dongponews.net
                kyoumhu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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