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10.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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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2막 - 10.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자
  • 김태진 사무국장
  • 승인 2015.07.2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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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진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사무국장(전 맨해튼한국학교장)

  학교가 이사를 하니 모두들 낯설어 하고 지난 학교의 장점들을 한마디씩 한다. 나 또한 학교 옆 그림같은 소공원이 그립고, 널찍한 주차장도 아쉽고, 조용하고 깨끗했던 주택가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무엇보다 그리운 것은 학교 바로 옆의 베이글 가게이다. 갓 구운 따끈한 빵에 차고 넘치게 발라주는 크림치즈와 진한 커피 맛이 일품이던 곳.

  어떤 분은 보스턴으로 대학 진학을 한 딸이 그 베이글을 매우 먹고 싶어 해 속달택배로 부쳐줄 만큼 환상의 맛을 자랑하는 곳이다. 생각해 보니 그곳에서 줄을 서지 않고 베이글을 산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빵과 크림치즈를 좋아하는 나로선 매주 최고의 베이글을 먹는 것도 또한 학교를 가는 행복 중의 하나였는데 이래저래 아쉬웠다. 

  학생 수가 조금 줄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오니 거리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학교 바로 옆이 ‘Social Security Office(사회보장국)’ 건물인 탓도 있는 것 같다. 토요일 아침, 학교는 등교하는 아이들로 붐비고, 바로 옆 건물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대부분 빈민에다 노숙자도 많다 보니 행색이 여간 초라한 것이 아니다. 한 학부모님은 학교에 오더니 정색을 하며 이런 환경의 학교에 아이를 못 보내겠단다. 어쨌든 몇 분이 그런 이유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학교에 오시는 학부모님도 주변 환경에 대해 걱정스런 말씀을 하곤 했다.
 
  교육 환경이 중요하긴 하지만 너무 민감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최상의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고 싶은 것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임을 또한 이해할 만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드는 맨해튼엔 유난히 사립학교가 많고, 우리 학교도 사립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비중이 꽤 높다. 교육철학, 방법 등을 살펴가며 정말 소중한 '내 아이'에게 맞는 최적의 학교를 고르고, 기타 환경도 꼼꼼하게 따지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다니는 한국학교도 예외일 수는 없나 보다.
 
  멋쟁이 경호는 학교에 티셔츠를 입고 온 적이 없다. 꼭 와이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친다. 아침에 일찍 나오려면 분주하기도 하련만 무스까지 바르고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 꼭 영국신사 같다. 몸에 밴 반듯한 자세와 예의 바름이 어려서부터 제대로 훈련을 받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역대 대통령을 많이 배출한, 뉴욕 인근의 Royal Family 들이 최고로 꼽는 아주 유명한 사립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경호 부모님, 특히 아버님의 교육철학이 경호를 어려서부터 귀족 교육을 시키려는 것이었기에 대학 학비를 능가하는 비용을 유아원(Pre-School)부터 쏟아 붇고 계셨다.
 
  워낙 최고급으로 키우려는 아버님의 고집 때문에 햄버거조차 ‘레스토랑’에서만 먹게 하셨다고 한다. 그런 경호가 2학년 때부터 다니게 된 한국학교는 경호 아버님이 계획한 학교엔 들어있지 않았다. 경호 어머님이 우연히 한국학교를 알게 되면서 다른 특기를 가르치려는 아버님의 의사를 무릅쓰고 토요일 아침의 외출을 감행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경호의 인간관계, 생활반경은 아버님이 쳐놓은 울타리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면서 잠자고 있던 경호의 아이다운 순수한 본능이 자극을 받게 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경호는 엄마를 조른다. 학교가 끝나고 우르르 ‘맥도날드’로 몰려가는 친구들 틈에 끼고 싶은 거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햄버거를 먹는 친구들을 부럽다 못해 절실한 바람으로 쳐다보는 경호에게 어머님은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준다는 조건을 내세운다. 그때부터 경호의 한국어에 대한 열정은 높아만 갔고 드디어 햄버거를 손으로 번쩍 들어 입으로 베어 먹으며, 얼굴에 케첩도 묻히고, 야채도 흘려가며 어그적 어그적 제대로(?) 먹어 본다. 나아가 Central Park에 가서 친구들과 뒹굴며 놀고, 거리에서 파는 핫도그까지 먹게 된다. 언감생심, 말은커녕 먹고 싶다는 마음조차 먹으면 안 되는 줄 알았던 그 ‘거리의 핫도그’, 결코 가까이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핫도그를 베어 먹을 때의 그 기분은 어린 경호에겐 하늘의 구름을 잡는 기분이었을 거다.
 
  그런데... 같이 먹은 다른 친구들은 다 멀쩡한데 경호만 배탈이 나 모처럼의 신나는 일탈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경호 어머님은 아이를 너무 곱게만 키웠다는 반성과 함께 좀 더 자연스럽게 풀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경호는 매주 토요일, 명문 사립학교의 고급스런 엄격함과 품위를 벗어나 자연인 경호로서의 자유를 누리며 한국학교를 더욱 신나게 다니게 되었다. 한국어 공부와 함께 몸의 면역성을 길러줄 바이러스도 적당히 넣어주면서 더 단단하고 폭넓은 Korean-American으로 성장하면서 말이다.
 
  경호는 그가 자란 환경과 다른 환경에 잘 적응한 사례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교장이 되고 나서 2번째 학기, 겨우 걸음마를 때고 여전히 낑낑대며 학교 운영을 하고 있을 때, ‘공개수업’을 마치고 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교장 선생님, 형진이 아빠가 수업을 보고 나더니 한국학교를 그만 다니라고 해서요... 학급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대요. 장난꾸러기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합심해서 산만하 니 수업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형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요. 그래도 제가 한국학 교를 그만둘 수는 없다고 하니 그럼 앞으로 아빠가 수업시간에 들어가서 지켜봐야 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미국의 가정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한국과 달리 아빠들의 교육열이 참 높음을 느낀다.
 
  “안됩니다. 수업은 교사의 신성한 권한입니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개방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이유로 수업을 참관할 수 없습니다... 대신 저와 담임이 산만한 아이들 지도에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형진이 역시 유명 사립학교를 다니며 구별된 교육을 받고 있었고, 형진이 아빠 또한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에서만 교육을 받으셔서 그런지 산만한 수업분위기가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으셨나 보다. 그러나 어쩌랴, 모든 학생이 다 똑같을 수는 없는 법. 다양한 환경과 성격의 아이들이 모여드는 학교의 특성을 학부모님이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다. 어쨌든 1교시 시작 때 내가 같이 들어가 처음 분위기를 잡아주고, 자주 점검을 하며 신경을 쓰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단락 시켰다. 그러나 2 주 후,
 
  “선생님... 미국학교 담임이 형진이가 산만해지고 거친 말도 한다며 놀라서 전화를 하셨어요. 신사 같던 형진이가 갑자기 달라진 이유를 모르겠다고,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겼냐고요... 형진이 아빠는 모두 한국학교 때문이라며 한국학교를 못 가게 해요. 죄송합니다. 아이 아빠가 너무 화를 내고, 당장 나쁜 효과가 드러나니 이젠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완벽(?)하기만 했던 형진이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부모님에겐 문제의 크고 작음과는 상관없이 당신 아이가 ‘지적’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히는 엄청난 사건이 된 듯했다. 원하지 않는 환경에서 아이를 완전히 빼가는 것보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옳고 바른 것을 지킬 수 있도록 지도하는 그것이 ‘교육’임을 피력했던 나의 말은 눈앞이 깜깜해진 부모님에겐 학교 입장에서의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고, 그들을 더욱 화나게 할 뿐이었다.
 
  마치 한국학교를 더 다니면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라도 하듯 학교에 대한 거부감이 커진 학부모를 설득하는 일 자체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진이의 이야기는 곧 학부모들 사이에 펴졌고, 몇 몇 학부모님은 산만한 두 학생을 학교 차원에서 그만 나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하였다.
 
  솔직히 한 학부모만 강하게 불만을 드러냈지만 다른 부모님도 모두 못마땅하실 텐데 이해하고, 참고 계신 분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 언제 어떤 빌미로 제2, 제3의 형진이가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이제 나의 고민은 단순히 형진이가 학교를 오고 안 오는 문제를 떠나 거칠고 산만한 정도가 심해 수업 분위기를 해치는, 그래서 다른 친구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화제의 그 학생들을 어찌할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화제의 학생 부모님을 만나 현재의 상황을 솔직히 말씀 드리고, 학교에 끼치는 악영향이 크니 ‘자녀를 데려가라’고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러나 작은 비즈니스를 하며 바쁘게 사는 분들께 Baby Sitter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학교를 떠나라는 말은 또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또한 한국학교에서 누리는 재미와 공부를 그 아이들에게서 뺏을 만큼 진정 학교를 떠나야 할 문제인가? 현 교포사회에서 우리 학교의 색깔은 어떠하고, 또 어떤 색깔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교장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옳고 현명한 일인가? 고통스러울 정도의 수많은 갈등 속에 철학의 부재(不在)인 나를 탓하며 머리와 가슴을 쥐어짜야 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자”였다. 오고 가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학교가 필요해 찾아오는 학생을 최선을 다해 교육시키자’에 초점을 맞추니 오랜 만에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다.
 
  결국 형진이는 학교를 떠났고, 화제의 두 학생은 개구쟁이로서의 악명을 높이며 학교의 여기저기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잘한 결정이었는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 가를 스스로 판단하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나가고, 겪어야 할 사회는 결코 ‘온실’이 아니기에... 좋은 영양분만 받아서 스스로 크기에는 그들이 열어갈 사회의 문이 복잡미묘하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또한 매우 다양하기에.
 
  그리고 수많은 열쇠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 ‘스스로’이어야 하니까... 사회보장국 앞의 빈민들을 보며, 산만한 친구들의 방해도 받아가며, 이 세상은 부자와 빈자, 힘있는 세력과 힘없는 세력, 조용한 사람과 시끄러운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공존하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이 더 귀하고 값진 공부가 아닐까? 그 다양함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나를 성찰하는 가운데 나의 세상을 찾고 만들어가도록 머리와 가슴을 열어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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