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기자조선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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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기자조선의 진실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7.0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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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무왕은 기자를 조선후로 봉한 사실이 없다.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 기자조선(奇子朝鮮)

 
▲ 이형모 발행인
  우리나라는 옛날 옛적부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 처음 조선은 단군조선이고 고조선이라고도 부른다. 두 번째는 기자조선이고 세 번째는 위만조선이 있다. 그리고 6백년 전 이성계가 창건한 나라도 조선이다. 기자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이암의 '단군세기'에서 알아보자.
 
  BC 2333년에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는 고조선이고, 21대 소태단군 치세 말에 ‘정변’이 일어난다. 소태단군께서 나이 많아 상장군 서우여를 살수지역 100리를 통치하는 ‘기수’로 임명하여 대업을 승계토록 추진하였으나, 우현왕 색불루가 이에 반대하고 주위의 세력과 수렵족 수천을 모아 부여의 신궁에서 스스로 즉위하였다. 소태단군은 할 수 없이 옥책과 국보를 내주었고 서우여도 서민으로 폐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정변이다.
 
  BC 1285년에 색불루가 22대 단군으로 즉위하자 이번에는 상장군 서우여가 군대를 일으켰다. 색불루단군이 직접 토벌에 나섰으나 승패없이 화해가 이루어졌다. 색불루단군이 서우여에게 삼조선의 하나인 ‘번조선’의 번한을 제안하고 받아들여지자 서우여를 ‘번한’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서우여의 ‘번조선’을 ‘단기고사’(대야발 편저)에서는 ‘기자조선’으로 따로 분류하고 있다.
 
  기자조선(奇子朝鮮)이라는 이름은 소태단군이 서우여를 신임하여 살수 땅에 봉하면서 내린 기수(奇首)의 칭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정변으로 부여신궁에서 스스로 즉위한 색불루에 비하여 서우여의 ‘기자조선’이 소태단군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는 역사인식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나 색불루단군 이후 후기 단군조선에서 ‘진, 막, 번조선’의 삼조선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기자조선이 별도의 왕조가 아니므로, 삼조선의 하나인 번조선의 별칭으로 인식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번조선의 마지막 번한은 ‘기준’으로 BC 194년에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사람이다.
 
 
  중국역사서가 말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사마천은 사기<송미자세가>에서 “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후로 봉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이 논란의 씨앗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이 어디인가는 논외로 하고, 과연 ‘기자’는 어떤 인물인가?
 
  중국의 역사시대는 하, 상, 주에 이어 춘추전국시대로 이어진다. 두 번째 상나라는 수도가 은(현재의 안양현)이어서 은나라라고도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BC 1600년에 동이족이 주도하는 상나라가 화하족이 주도해 온 하나라를 정벌하고 550년 동안 중국의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
 
  BC 1046년에 상나라 주(紂)왕이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주나라 무왕이 동쪽으로 진격하여 목야에서 전투를 벌여 상을 멸망시켰다. 주(紂)왕에게 ‘미자’라는 이복형이 있었는데 기자(箕子)는 대 학자로서 미자의 스승이었다. 상나라의 국운이 꺼져가는 시기에 기자는 제자인 미자에게 ‘모시던 왕이 잘못하여 망하게 되었으니 기자 자신은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 그러나 미자는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하라.’고 권유한다.
 
  ‘서경’에서 주 무왕과 기자가 함께 언급된 것은 ‘무성’과 ‘홍범’이다. ‘무성’편에는 ‘주 무왕이 상나라에 이긴 뒤 제사를 지내고 제후들의 공을 치하하고 붙잡힌 상나라의 기자를 풀어준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홍범’편에는 ‘주 무왕이 기자를 찾아가 치국의 도를 물으니 기자가 홍범으로 대답하며 홍범의 구주를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주 무왕의 행적 어디에도 ‘기자를 조선후로 봉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기자(箕子)조선'은 없다
 
  <미자지명>에는 주나라가 새로 제후를 임명할 때 무왕의 아들인 성왕이 미자를 송나라의 제후로 봉하는 내용인데 기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의 주석에 ‘양나라 몽현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몽현은 송의 도읍지인 ‘상구’지역으로 미자의 분봉지이므로 기자가 주나라 시대에도 미자의 분봉지에서 관계를 지속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후로 봉했다’는 사기의 기록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찍이 주 무왕이 직접 찾아가 ‘치국의 도’를 물을 정도의 중요 인물인 기자를 제후로 봉한 기록이 ‘서경’에서 누락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후대에 사기 <송미자세가>에서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라는 돌출 기록은 한 무제가 ‘위만’을 멸한 후 그 지역의 연고권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역사 조작’에 불과하다.
 
  한편 이암의 ‘단군세기’에는 “25세 솔나 단군, 정해 37년(BC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살면서 사람들의 왕래를 사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대의 오차는 있으나, ‘상나라가 망하고 물러나서 숨어사는 기자의 모습’을 정확히 기록하여 ‘서경’의 기록과 상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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