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오만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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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오만과 편견
  • 이병우 총경리
  • 승인 2015.06.1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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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우 총경리(상양 국신광전 실업 유한공사)
  한국의 여름은 습기가 없어서 참 좋습니다. 비록 낮에는 기온이 30도를 넘어가기도 하지만 아침과 저녁은 공기도 맑고 선선합니다. 다만, 가뭄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어서 심각한 상황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심부름으로 동산 너머 밭에 가서 감자를 캐서 돌아 올 때 예고도 없이 쏟아졌던 장대 같은 소낙비라도 몇 차례 내리면 좋으련만, 웬일인지 6월 장마 비는 꿩 구워먹은 소식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지금 메르스 사태와 가뭄으로 어수선합니다. 저는 작금의 메르스 전염병 사태를 보면서 문득 “오만과 편견”이라는 소설이 생각나더군요. 소설의 줄거리처럼, 남녀가 서로 교제를 시작하면서 상대에 대한 선입관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흔히 먼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곤 합니다. 건방지고 오만한 느낌이 있을 수 있고, 예의바르고 정중하다는 인상도 있을 겁니다.

  반면에 치밀하고 꼼꼼하다는 판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좀 더 오래 사귀면서 나의 선입관이 지나친 편견이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자매는 마침내 그런 우여곡절의 사연을 극복하면서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됩니다. 사실,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우리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나서 관계를 맺으려 할 때 가장 곤혹스런 것이 상대가 아주 “오만하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더구나 예의와 존중을 겸양으로 여기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오만하다”는 첫인상은 아주 치명적입니다. 그 다음부터 진행되는 둘의 관계는 험난한 파도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대에 대한 평가와 느낌이 나중에 편견이었음을 발견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립니다. 물론, 처음부터 아예 상대의 “오만한 태도”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그마저 “편견”을 해소 할 길도 없습니다. 제가 메르스 사태의 확산이 제발 멈추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한 구석에서 오만과 편견이 생각난 것은 아마도 삼성 서울병원에 대한 분노와 답답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사람들이 참 오만하다는 겁니다. 오만방자한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아예 난리판으로 만들 정도라는 겁니다.

  그런 오만하고, 경우가 없고, 방자한 사고방식이 어디서 연유되었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더군요. 더 웃기는 이야기는 그런 상대의 오만함에 누군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부도, 국민도, 환자도, 문병 간 사람들도, 병원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오만한 병원의 자세와 태도와 무방비에 가까운 대처 방식에 아무런 대응 능력이 없는 겁니다. 속된 말로 오만함이 “난리 부르스”를 쳐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겁니다. 보건복지부 위에 삼성 병원이 있는 건지, 아니면 청와대 위에 삼성이 있는 건지, 제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중국에서 너무 오래 살다보니 한국 돌아가는 사정을 모를 수도 있을 겁니다. 지도자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회주의 문화에 습관이 된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가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하고 국가를 혼란에 빠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삼성 서울병원의 이름을 공개해서는 안 되는 제도는 아닐 겁니다. 그것이 상대를 향한 예의이고 존중의 자세는 더 더욱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이 게 현실이더군요.

  옛날에 중국인 두 사람이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는 바람에 고을 현감 앞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현감이 싸운 원인을 물어보니 한 사람이 말하길, 상대방이 자꾸 사칠은 이십칠(4 X 7=27) 이라고 해서 사칠은 이십칠이 아니라 이십팔이라 했더니 자꾸 이십칠이 맞는다고 우기는 바람에 싸움이 붙었다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현감은 이십칠이라고 우긴 사람은 석방하고 이십팔이라고 한 사람에게는 형장 10대의 벌을 준 겁니다. 매를 맞고 난 이 사람은 하도 어이가 없고 억울해서 현감에게 따진 겁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벌을 받아야 했느냐?” 이에 현감은 “네 말대로 당연히 사칠이 이십팔이 맞는다. 그러나 이십칠이라고 우기는 놈하고 기어이 싸움을 한 네 놈이 더 한심하다” 이런 겁니다. 비록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냥 단순히 웃자고 하는 이야기도 아닐 겁니다.

  아마 매를 맞은 사람은 하도 답답해서 싸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자명한 이치와 진리를 무작정 부정하는 상대가 미웠을 수도 있습니다. 몇 번 잘 설명하면 금방 알아들으려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 게 아니라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화가 난 겁니다. 그야말로 한 대 쥐어박고 싶었을 겁니다. 급기야 싸움이 붙은 거지요.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놈은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정의감도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결과는 관청에 끌려가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현감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이 아닌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놈과 대낮에 싸움을 한 자신이 잘못한 겁니다.

  무식한 것과 오만한 것은 의미가 틀립니다. 정말로 무식한 사람에게는 측은하고 순수한 연민의 정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에게 우리는 순수와 순진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기분이 안 좋은 겁니다. 상대의 건방진 태도가 눈에 거슬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 오만 방자한 사람에게 사칠이 이십칠이 아니라 이십팔이라고 가르쳐 주어도 고집을 부리면 방법이 없습니다. 자칫하면 관청에 끌려가서 매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국민들은 무관심해지는 겁니다. 정부와 병원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질 않는 겁니다. 불신의 사회가 되는 겁니다. 시간이 흘러 그 오만함이 우리들의 편견이었다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삼성 서울병원의 오만함과 정부의 무식함이 부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들의 편견”으로 판명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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