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조선과 중원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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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조선과 중원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5.2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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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민족문화연구원장 심백강 박사는 그의 저서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우리역사”에서 중국 역사책들이 말하는 ‘고조선의 서쪽 강역’을 찾아내고 있다. 그는 일찍이 대만사범대학과 중국연변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수학하고, 주변국들과 국내 식민사관학자들이 왜곡하고 있는 ‘우리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고조선의 서쪽강역’에 대한 그의 글을 아래와 같이 발췌, 요약해본다.

  한나라 낙랑군은 어디에 있었나?

  당나라의 학자 장수절은 사기를 설명하는 주석서 ‘사기정의’에서 ‘괄지지’를 인용하여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이는 본래 한나라의 낙랑군 왕험성이며 바로 고조선이다.”

  이것은 고조선에서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다시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시대에 따라서 그 지명상의 변동이 있었으나 모두 동일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냐, 발해 부근의 요서지역이냐에 따라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성의 처음 위치가 밝혀지는 것이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수성현’은 낙랑군 25개현 중에 하나이다. ‘후한서’ ‘진서’ 까지는 이 수성현이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는 기록이 보인다. 북위시대에는 수성현은 ‘영웅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여기에 남영주가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수나라에 이르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부활하는데 낙랑군 소속이 아닌 ‘상곡군’ 수성현으로 되어 있다. 25개현으로 출발한 낙랑군의 현들은 모두 사라지고 수, 당 이후까지 수성현 하나가 살아남아 있다. 지금까지도 ‘하북성 서수현 수성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 확인된다.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낙랑군은 오늘날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서 발해 유역을 따라 서쪽으로 서수에 이르기까지 25개현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수성현은 서쪽 끝 부분에 위치한 현이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수안’으로 비정된 것이 바로 ‘수성현’이다. 한반도 대동강 유역과는 정반대 쪽으로 너무나 멀다.

  갈석산

  ‘진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여기가 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낙랑군, 갈석산, 만리장성 등 한국 상고사의 핵심이 되는 주제가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

  다음으로 갈석산에 관하여, ‘수서 지리지’는 ‘북평군 노룡현’조항에서 “여기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수, 당 이후 평주 노룡현에 있던 갈석산은 서진시대 낙랑군 수성현에 있던 갈석산과는 다른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옛날(진나라,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 지역으로 여겨지는 현재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에는 과연 갈석산이 있는가? 현재 서수현 수성진에는 갈석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서수현 부근에는 옛 갈석산으로 추정되는 산이 있다. 백석산과 그 지류가 되는 낭아산이 그것이다.

  전국시대 당시에는 백석산(白石山)이 본래 갈석산(碣石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낭아산 역시 산 위의 돌들이 마치 비석을 세워 놓은 듯 삐죽삐죽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그 산 이름이 본래는 갈석산이었는데 나중에 그 이름을 감추기 위해 모습이 이리의 이빨을 닮았다는 의미로 낭아산(狼牙山)이라고 명칭을 변경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 송시대의 노룡현, 현재의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은 그 이름이 본래는 갈석산이 아니라 게석산(揭石山)이었다. 반고가 쓴 ‘한서 지리지’에 “대게석산이 우북평군 여성현의 서남쪽에 있다. 왕망이 이를 게석산이라 하였다.”

  진, 한시대의 우북평군은 진나라 때 요서군이 되었고, 수, 당시대에는 북평군이 되었으며 군청소재지가 노룡현에 있었다. 게석산이 본래는 노룡현에 있었는데 뒤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창려현이 되었다. 이곳은 오늘날 진황도와 산해관 부근이다.

  동한 말년에 ‘문영’이라는 사람이 ‘한서 무제기’에 나오는 갈석산에 대해 주석을 내면서 게석산을 가리켜 갈석산으로 해석하였다. 이후 중국의 역대 사가들은 의도적으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이 굳이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던 갈석산을 하북성 동쪽 창려현으로 옮겨다 놓으려고 그토록 애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날은 압록강이 중국과 조선을 나누는 경계선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갈석산이 중원과 고조선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즉 갈석산이 어디에 위치해 있었느냐에 따라서 쌍방이 소유한 역사영토의 넓이가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영토를 결정짓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지도상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 부근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진황도시(秦皇島市)가 있어 마치 진시황 때 쌓은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 이곳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산해관에서 부터 북경에 걸쳐 쌓은 장성은 명나라 때 주원장이 ‘서달’에게 명하여 쌓은 명나라 장성이다. 서진 무제 ‘태강’시기에 편찬된 ‘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으며 이곳이 장성의 기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북성 서수현에는 ‘낙랑군 수성현’과 동일한 이름의 수성진이 있고, 갈석산에서 이름이 변경된 것으로 보이는 백석산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여겨지는 연나라의 고장성 유적이 있다. ‘서수현지’에 “연나라 옛 장성이 수성의 북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통일천하를 이룩한 다음 전국시대 7국의 장성들을 연결시켜 쌓은 것이다. 따라서 가장 동쪽에 있었던 연나라 장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 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국시기에 편간된 ‘서수현지 고적’조항에도 “옛 장성이 서수현의 서북쪽 25리에 있다. 예로부터 진시황이 장수 몽념을 무수(武遂)로 보내 장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무수는 ‘수성’의 전국시대 지명이다.

  3 요소 -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 진나라 장성

진나라 ‘태강지리지’에서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거기서 장성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낙랑군의 위치는 오늘날 북경 남쪽에 있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이다.

  그곳에 옛이름 갈석산으로 보이는 백석산이 있다. 그리고 진시황이 장수 몽념을 시켜 쌓은 진나라 장성의 유적이 있다. 이 곳이 태강지리지가 증언하는 옛날 ‘중원과 고조선의 경계선’이다. 

 
  진시황이 통일천하 했을 때(BC221년)는 '고조선'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나고, 대부여(188년 간)를 지나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 단군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그리고 진 왕조가 3대 자영에 이르러 망하고, 한 고조 유방에게 항복하던 BC207년은 '북부여' 해모수 단군 33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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