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 칼럼] ‘선비’에 대한 한국인들의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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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대 칼럼] ‘선비’에 대한 한국인들의 오해
  • 신성대 동문선 대표
  • 승인 2015.04.2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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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블TV CHING 채널에 중국 사극 프로그램 <공자(孔子)>가 방영된 적이 있다. 5회 편에 보면 어린 시절 공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부, 오(吳)나라의 왕위계승권자임에도 왕 되기가 싫어 노(魯)나라에 주재하는 사신 역을 자청하여 공자의 집에 하숙하고 있던 계찰(季札)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소년 공자에게 식견을 높여주고자 성인식 관례(冠禮)를 치러준 후 함께 중국 고대사의 주요 사적지를 소오(笑傲) 주유(周遊)하며 ‘선비(士)’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국사람들 생각하듯 제후국가의 가신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가 ‘선비’가 아니고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을 원조 ‘선비’라고 가르치고 있다. 문과 급제하여 입신양명코자 글 읽던 조선 선비가 아닌 수십 년 황하 치수 작업으로 다리의 털이 모두 없어져버린 우(禹) 임금처럼 국민을 위해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의 국가지도자가 오리지널 ‘선비’인 것이다.

  조선에서의 사(士)란 곧 문사(文士)를 일컫지만 일본이나 유럽은 무사(武士), 즉 기사(騎士)를 이르는 말이다. 기실 중국도 한(漢)나라 이전에는 문무(文武)의 구별이 없었다(TV 장면에서 공자는 수시로 칼을 차고 다닌다). 문사(文士)는 원래 사(士)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 시절의 사(士)란 곧 무사(武士)를 의미했었다. 당연히 벼슬은 군공(軍功)으로 나누었었다.

  신라의 화랑, 서양의 기사, 일본의 사무라이는 문무겸전의 완성적인 인격체였다. 허나 중국과 한국은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문무가 구별되고 그에 따라 편향된 인격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편협하고 고집스럽고 배려심 없는 인성과 반쪽짜리 세계관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상무숭덕(尙武崇德)의 무인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정신이다.

  문(文)은 쪼개지는 성질이 강한 반면 무(武)는 하나로 합치려는 성질이 강하다. 고려 무신정권은 하나됨을 위해 투쟁했지만 조선 사대부들은 쪼개지기 위해 싸웠다. 진정한 하나됨, 화합, 통일은 개개인의 문무겸전, 즉 완성된 인격체다. 그런 나라 국민들은 굳이 화합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 땅의 수많은 지식인[文士]들이 갈등 치유와 화합을 부르짖고 있지만 기실 다 헛소리다.

  속을 들여다보면 그 반대다. 갖은 명분을 내걸고 좁쌀 하나라도 쪼개서 자기 몫(영역)을 챙기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레 미제라블 코리아! 결국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러니 동서화합, 남북통일 운운하기 전에 문무통일부터 해서 쪼개기 좋아하는 국민성부터 바꿔야 한다. 우선 고등학교의 문과 이과 구분을 하루 빨리 없애야겠다. 단언컨대 문(文)이 화합한 적은 인류사에 단 한 번도 없다. 문명은 언제나 입으로 갈라서고 칼로 봉합해왔다.

▲ 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및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장
  당연히 혁명이나 창업은 무사 혹은 무사적 기질을 가진 자의 몫. 개화기 일본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상업과 무역에 뛰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서구 선진문명을 배워와 개혁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기존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해 결국은 유신을 성공시켰다. 반면 조선은 글 읽던 샌님들을 유람단으로 보내는 바람에 실패했다. 여행기를 남기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용기를 내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뒷감당도 못하고 사흘 만에 제 한 목숨 건지고자 줄행랑쳐 버렸다.

  숭문(崇文)에는 주인의식 없다. 진정한 주인의식은 상무(尙武)에서 나온다. 아무렴 옛것에 집착해서 새것을 못 받아들이면 굴욕을 피할 수 없음이 역사의 대명제. 혁신 없는 전통은 박제일 뿐, 아름답질 못하다. 융합과 통섭의 시대다.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혁신! 혁신 그 자체를 전통으로 삼아야 글로벌 시대를 선도해나갈 수 있다. 무혼(武魂) 없이는 개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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