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한인회 리콴유 前 총리 조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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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한인회 리콴유 前 총리 조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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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4.2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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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 전 총리 서거

▲ 싱가포르 한인회가 서거한 리콴유 전 총리의 분향소에 조문을 다녀왔다.(싱가포르 한인회 소식지 한누리 4월호)

  이 글은 싱가포르 한인회 소식지 한누리 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 편집자 주 -

  지난 3월 23일 새벽 3시 18분 리콴유 전 총리가 9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 올해는 싱가포르의 독립 50주년을 맞는 해 로서 리콴유 전 총리의 서거는 국민들에게 더욱 안타까움을 안겨 주었고 세계 여러 나라의 시선이 아시아의 강소국 싱가포르에 집중되는 순간이 되었다. 24일 대통령궁 (Istana)에서 가족장을 치른 뒤, 25일 리 전 총리의 시신이 국회의사당(Parliament House)으로 옮겨졌다. 이른 아침부터 외신기자들과 국민들이 운구 행렬을 지켜보는 가운데 국회의사당에 안치된 리 전총리에 대한 일반인의 조문은 10시부터 시작되었다. 국회의사당 주변의 길을 가득 메운 대중들의 조문은 나흘동안 이어져서 45만 여명을 기록하였다. 혼잡을 피하기위해 인근 주민들에게는 싱가포르 전 지역에 있는 커뮤니티 센터 17개소를 개방하여 총 100만 명이 넘는 조문 인파가 밤낮없이 줄을 이었다.

▲ 싱가포르한인회 소식지 한누리 4월호 표지
  리콴유 전 총리는 1979년 첫 한국 방문 이후 6차례나 한국을 오가며 한국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싱가포르 한인회에서는 3월 24일 Istana 궁에 조의를 표하는 카드와 함께 조화를 직접 전달하였다. 그리고 노종현 회장을 비롯한 대의원들은 3월 25일 오전 8시부터 조문 행렬에 참여하여 세 시간 반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후 국회의사당에 안치된 고인에게 조의를 표할 수 있었다. 조문이 시작되기 전 이른 아침부터 이미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 그리고 질서를 지키며 장시간 기다리는 국민들의 태도에서 리콴유 전 총리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었다.

  싱가포르정부는 조문에 수많은 인파가 몰리자 예정했던 하루 10시간의 조문 시간을 하루 24시간으로 연장하기로 발표하였고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지하철 운행도 24시간으로 연장하였다. 흰셔츠에 검은 완장을 두른 군인들은 대기하는 줄을 정렬하고 조문객들에게 생수병을 나누어주는 등 최대한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조문객을 맞았다. 첫날 오후부터 5시간에서 8시간 기다리는 사태가 생기자 음료수와 간식 등이 제공되기도 하였다.

  장례식은 조문기간의 마지막 날인 3월 29일 (일) 오후 2시부터 NUS(싱가포르국립대학)강당 문화센터에서 엄수됐다. 이날 장례식에는 장남인 리센룽 현 총리를 비롯한 가족과 토니 탄 대통령, 고척통 전 총리등 국가주요인사가 참석하였다. 외국 조문단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리엄 헤이그 영국 보수당 하원 대표,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 중국의 리 위얀차오 국가부주석, 호주의 토니 애벗 총리,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데이비드 존스턴 캐나다 총독 등 각국 지도층 인사가 참석했다. 이날 치러진 검소하고 엄숙한 국장은 리센룽 총리를 선두로 토니 탄 대통령, 고촉동 전총리 등 10명이 추도사를 낭독하며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고인의 셋째 아들 이센양은 추도사에서 아버지를 회고하는 감동적인 연설로 수 많은 사람에게 가슴 뭉클한 순간을 안겨주었다.

  Remembering Lee Kuan Yew

  “저에게 지금은 더없이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제 평생 저는 우리와 말레이시아가 통합된 하나의 국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총리인 나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민과 싱가포르 정부를 대표해 1965년 8월 9일 오늘부터 우리 싱가포르는 자유와 정의의 원칙 위에 세워진, 국민의 복지와 행복, 보다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영원한 주권국가, 민주독립국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리콴유 전 총리는 누구인가?

▲ (싱가포르 한인회 소식지 한누리 4월호)
  Lee Kuan Yew, (1923 – 2015) 리콴유 전 총리는 1923년 9월 싱가포르에 정착한 부유한 중국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싱가포르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의 법과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고, 1950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영국에서 사회당에 입당하기도 했던 그는 귀국과 함께 노동운동에 가담, 노동자들의 임금협상과 파업 등에 참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정치에 첫발을 내딛고 1959년, 35살의 젊은 나이에 영연방 싱가포르 자치령의 총리가 된다. 1965년 말레이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의 초대총리가 된 리 전 총리는 부정부패 방지와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해 마침내, 공직자 사이에 청렴성을 뿌리내리고 일반 시민들의 생활 속에서 부패를 허락하지 않는 전통을 자리 잡게 했다. 또한, 치안, 사법, 보건, 교육, 수송, 노동, 서비스 부문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 외국 기업들이 앞다투어 싱가포르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게 하였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미스터 클린 아시아'로 불리며 아시아의 주요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리콴유 전 총리는 어떤 평가를 받는가?

  싱가포르정부의 영어로 된 발표문을 보면, 리 전 총리를 Singapore’s Founding Father(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로 적고 있다. 인구 550만 명의 작은 도시국가. 그러나 국가 경쟁력에서는 언제나 1, 2위를 다투는 작지만 강대한 나라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발전을 이야기하면서 리콴유 전 총리의 이름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다. 싱가포르와 리콴유는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싱가포르를 더욱 좋은 나라로 발전시키고자 꾸준히 노력했고, 국민들도 자신을 따라 달라고 부탁하면서 나라를 이끌었다. 그래서 싱가포르 국민은 35년 가까이 1당 체제로 통치한 리 전 총리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리 전 총리는 국가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에게서조차 배울 것이 있다면 선입견 없이 배웠다. 리 전 총리는 31년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총리로 재직한 인물이며,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부국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리콴유 전 총리의 깊은 철학과 통찰력에서 우러나온 비전, 그리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과감한 도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싱가포르도 없었을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총리의 파트너 부인 콰격추 여사>

  “죽거든 아내와 합쳐 달라"는 유언을 남긴 리콴유 전 총리의 부인 콰격추(Kwa Geok Choo, 1920-2010) 여사의 사랑은 이미 널리 알려진 스토리이다. 이미 영국 유학시절 결혼한 두 사람. 리콴유 전 총리는 자신의 부인을 파트너라 부르며 모든 일을 의논하며 싱가포르를 최고의 국가로 이끌어 갔다. “아내의 죽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구멍을 내게 안겼다"고 고백했던 리 전 총리는 아내 생각에 잠을 깨는 날도 많았다. 이렇듯 리콴유 전 총리는 국가의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귀감을 주고 있다.

  <난초로 하나가 된 리콴유 부부>

  24일 싱가포르 국립식물원은 리콴유 전 총리의 이름을 딴 Aranda Lee Kuan Yew 난초를 그의 아들 리셴룽 현 총리에게 전달했다. 이 난초는 '아라크니스 후커리아나'라는 야생 난초와 콰격추 여사에게 헌정하기 위해 품종 개량으로 만들었던 Vanda Kwa Geok Choo 라는 이름의 난초를 교배해 만들었다. '리콴유 난초'는 리 전 총리 부부를 하나로 합친 난초인 셈이다. 이 난초는 나란히 솟은 한 쌍의 줄기에 꽃이 피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부부처럼 보인다.

  <리콴유 총리의 빨간 가방>

▲ 조문을 마치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촬영하는 싱가포르 한인회 관계자들.(싱가포르 한인회 소식지 한누리 4월호)
  폭이 제법 넓은 두툼한 빨간색 가방은 리콴유 전 총리가 병실에서도 챙길 정도로 무척 애착을 가졌던 가방이라고 한다. 리 전 총리는 생전, 사람들이 이 가방을 궁금해하면 '이 안에 말썽꾼 혼내줄 손도끼가 들어 있다'고 말하며 대답을 피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헹 스위 킷
현 교육부 장관이 자신의 SNS에 '빨간 가방의 비밀'에 대해 말하며 궁금증이 풀리게 되었다. 우연히 본 가방안에는 연설문 초안, 외국 정상들과의 대화록, 갖가지 정책에 대한 구상, 심지어 반성문까지 가득했다. 리 전 총리는 사소한 생각들도 늘 메모를 해 보관을 했다고 한다. 이 가방은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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