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광무개혁과 아관파천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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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광무개혁과 아관파천의 진실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4.0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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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이태진 교수의 저서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에서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에 관한 진실을 찾아보자.

 

  아관파천

  1896년 2월 6일 새벽에 왕은 세자와 가족들을 데리고 경복궁내 건청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1894년 7월 이후 건청궁에서의 생활은 일본군의 감시 속에 있어서 불안했습니다. 1895년 10월에는 왕비가 시해된 곳이 건청궁입니다.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 왕은 총리대신 김홍집에게 왕비가 시해된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 끔직한 사건이 3개월여 은폐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서울에 남아있던 일본군들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그런 틈에 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교과서를 통해 배운 역사는 이 대목에 대해 ‘아관파천’이라고 하여 왕이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간 부끄러운 역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료를 통해서 연구해 보니까 그러한 이야기는 당시 일본공사관 측의 사주를 받은 친일세력들에게서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일제하에서 조장되었던 이야기였습니다.

  누구든지 고종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경복궁을 나와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경복궁은 왕비가 살해된 곳입니다. 그리고 군주가 군주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일본군이 포위하다시피 한 곳입니다.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바보짓이 아니겠습니까?

  군주권 회복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후에 왕은 비로소 군주권을 회복합니다. 지금까지는 일본이 일본식 제도로 내각이라는 것을 만들어 친일적 인사를 총리대신이 되도록 하여 그가 일본공사관의 지시를 받아 국사를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근대적 정치에서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강요한 것입니다.

  왕은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빼앗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왕정을 정상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한 등급 격상시켜 제국으로서 재출발하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이 영토가 작기 때문에 제국을 칭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부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신하들이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형식을 빌어 즉위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한제국으로의 대반전

  “이것은 내가 황제로 높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일본이나 중국이 모두 황제국인데, 우리만 군주국으로 남아 우리 국민이 중국이나 일본의 국민에 비해 한 등급 낮게 간주되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중국이나 일본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는 계기를 만들어서 재출발하자.”는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고종황제는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근대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습니다. 이 시기의 개혁을 학자들은 ‘광무개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 육군 참모차장의 명령으로, 일본 공사의 지휘를 받은 미야모토 다께이찌로 소위를 포함한 10명의 일본 장교들에게 건청궁 안에서 왕비가 시해당하고, 일본군에게 24시간 감시당하고, 내각과 총리대신까지 일본공사관의 수중에 떨어진 상황에서, 경복궁을 탈출하여 ‘아관파천’을 결행하는 고종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군주권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대한제국’으로 대세 반전을 도모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 힘차게 광무개혁-제2차 근대화작업-을 추진하는 고종황제의 불굴의 투쟁을 보며 ‘아관파천의 진실’을 되새긴다.

  고종황제는 즉위 초년에 정조대왕을 멘토로 삼는 군주가 되고 정조대왕의 꿈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그는 재위 44년(1864~1907)동안 초심을 변치 않고,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과 침략에 굴하지 않고 국가 개조와 근대화작업에 매진하여 ‘자주독립국가’의 길을 모색했다. 1907년 일제의 강요로 황제에서 퇴위한 후 1919년 1월 21일 일본 수상 데라우찌의 밀명으로 독살되기까지 ‘고종황제는 마음으로 나라와 백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광복, 분단 70주년에 주변 4강에 휘둘려 통일하지 못하고 있는 21세기 한국정치가 ‘100년 전 고종황제’에게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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