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기
상태바
[역사산책]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기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3.27 16: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형모 발행인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통감을 저격, 처단하고 일제의 일방적인 재판 끝에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날이 1910년 3월 26일이고 올해로 105주기가 되었다. 공개된 자료들을 축약하여 읽으며 안중근 의사를 함께 추모하자.

 

  안중근 의사는 1897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안인수’이고 아버지 진사 ‘태훈’과 어머니 조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이다. 고려 말 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부친 안태훈은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녔다.

  안중근 의사는 8세 때부터 조부로부터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녔다.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청년으로 성장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안중근 의사는 해외 망명을 결심, 산동을 거쳐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를 계기로 귀국한다.

  3월 고향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하여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해서 학교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개월 뒤 노령으로 갔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북간도 관리사 ‘이범윤’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의병지원자가 300여명이 되자 김두성,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 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 회령전투에서는 5천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의회’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키 가리에서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 등 12명의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안중근,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김태훈은 이완용의 암살 제거를 손가락을 끊어 피로써 맹서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러시아 ‘코코프체프’장관과 약 25분간 열차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9시 30분경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 의사가 뛰어 나오면서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동기를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했다.

  재판과정에서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판사, 검사, 변호인 모두 일본인이고 통역관과 방청인도 모두 일본인인 재판에서, 언도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나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 감옥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 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하지 말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 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고,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으며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증거가 되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