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대한제국 근대화와 일본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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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대한제국 근대화와 일본의 역할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03.1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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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이태진 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에서 대한제국의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찾아 요약해 본다.

 

  대한제국이 국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착수한 서울 황성 만들기는, 1896년 7월에 ‘철도규칙 6개조’가 공시된 뒤에 바로 이어서 9월 30일에 ‘한성의 도로의 폭을 개정하는 건’이라는 내부령으로 시작된다. 간선도로를 침범한 주택, 상가, 창고들을 걷어내는 것이 도시개조사업의 출발점이었다.

  개발 주역은 ‘초대주미공사 박정양 팀’

  도시개조사업의 모델이 된 것은 미국의 워싱턴 DC 였고 초대주미공사 ‘박정양 팀’이 중심이 되었다. 공사였던 박정양은 이 시점에서 총리대신 겸 내부대신이고, 공사의 수행원이었던 월남 이상재는 내부(행정안전부 겸 국토부) 토목국장이 되었고, 20대에 번역관으로 수행했던 이채연은 한성판윤(서울시장)이 되었다.

  미국 유학생 제1호로 알려진 이계필은 콜롬비아대학 출신으로,  이채연이 한국에 할 일이 많다고 하면서 이 사람을 귀국할 때 데려와서 이때 한성소윤(부시장)이 되었다. 외국인으로는 영국사람 맥레비 브라운이 총해관사(관세청장)로서 재정 담당을 했다. 고종황제가 서양 여러 나라 중에서 제일 먼저 조약 체결의 상대로 삼은 것이 미국이었고 서울을 현대적인 도시로 바꾸는 데서도 워싱턴 DC를 모델로 삼았다.

  워싱턴 DC의 방사상 도로체계가 모델

  워싱턴 DC의 도시적 주요 특징은 방사상 도로 체계와 기념 시설과 공원들 그리고 곳곳에 들어선 인물조각상들이고 이런 것들을 서울에 도입하려는 것이 개조사업의 핵심이 되었다. 방사상 도로체계는 지금 서울의 시청 앞, 또는 덕수궁 앞이 중심 출발점이 되었다.

  서울의 궁궐들은 북쪽 산 밑에 쭉 늘어서 있다. 이런 배치는 군주가 남쪽을 향해서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새 사업에서는 궁궐을 도심 가운데에 두고 방사상 도로체계의 기점이 되도록 했다.

  워싱턴 DC의 도로체계는 하나는 백악관, 다른 하나는 의회를 각각 기준 건물로 하고 있다. 서울의 방사상 도로체계는 경운궁(덕수궁)을 그 기준 건물로 삼았다. 이것은 경운궁을 백악관에 비견한 것이다.

  당시에 발행되던 ‘독립신문’의 기사들에 근거하여 파악해 보면, 기존의 도로로는 종로와 남대문로가 간선이었는데, 이 두 도로를 침범한 가가(상점)들을 철거하여 길을 넓히고 전차가 달리도록 했다. 그리고 전차는 경성철도정거장(서울역)에 연결되도록 했다. 이것은 여기서 전국으로 이어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1899년 동경보다 3년 앞서서 부설된 전차는 종로 2가에 있던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시공했다. 이 회사는 고종황제와 미국계 ‘콜브란 보스트윅 회사’가 50%씩 출자하여 만든 것인데, 당시 전기와 상하수도 시설 등을 전담했고 사장은 서울시장, 즉 한성판윤 이채연 씨가 겸임했다. 

  전국철도노선 조사

  앞서 언급한 1896년 ‘철도규칙 6개조’에 이어 대한제국 정부는 1898년 영국인 재정고문 맥레비 브라운에게 맡겨 전국철도노선 조사를 완료했다. 보고된 노선은 첫 번째 서울-목포(호남선), 다음으로 서울-원산(경원선), 그리고 원산-함경도 경흥 노선을 보고한다. 이 두 개 노선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실제로 시설했다.

  그 다음에 제시한 것이 원산-평양-진남포를 잇는 노선인데 이것은 북한지역을 동서로 횡단하는 노선으로 일제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더 위쪽에 함경북도 경흥에서 평안북도 의주까지 횡단하는 노선인데, 이것은 아주 험한 산맥들을 관통하는 것으로 광산개발에 대해 특별한 목적의식을 가지지 않고서는 상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한제국이 실제로 착공까지 한 것은 서북철도 하나이지만, 이런 전국적인 철도망에 대한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것은 국토개발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고종황제의 근대화와 국토개발사업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중단되었다.

  철도노선 조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양지(量地)아문’이라는 측량 전담 부처를 확대하고, 1898년 총리대신이 총재관을 겸하고 부총재관으로 한성판윤 이채연과 총해관사 맥레비 브라운을 임명한다. 앞으로 있을 국토개발을 위한 대토목공사들을 계획하면서 측량사업의 비중이 커질 것에 대비해 취해진 조치이다.

  대한제국 원표

  지금도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앞에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비전’이 서 있다. 처음에 세워졌던 건물보다는 3분의 1로 축소된 상태인데 이 건물 앞쪽 계단 옆에 작은 표석이 있다. 이것은 양지아문에서 세운 측량기점으로 원표(元標)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워싱턴 DC에 있는 ‘제퍼슨 스톤’과 거의 같다. 이 돌은 미국 3대 대통령 제퍼슨이 대륙으로 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미국 독자의 측량기점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세운 것이다.

  이것은 국토개발사업의 주역들이 ‘주미공사관’에서 근무할 때, 워싱턴 DC에서 제퍼슨 스톤을 보고 같은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보여 진다. 도쿄 니혼바시에 있는 일본의 측량기점은 땅 바닥에 파묻힌 형상으로, 서울의 원표와 같은 디자인은 워싱턴 DC의 제퍼슨 스톤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대한제국 근대화에 일본이 도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종일관 방해하고, 강제 침략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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