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경찰이 가둬놓고 소방호스로 휘발유 뿌린 뒤 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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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이 가둬놓고 소방호스로 휘발유 뿌린 뒤 방화”
  • 허겸 기자
  • 승인 2015.03.10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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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사할린 시스카 경찰서 한인 학살’ 구체적 증언 담긴 구 소련 KGB 문서 첫 공개


  일제가 항복 선언 직후인 1945년 8월20일 사할린 시스카(敷香.Поронайск)에서 한인들을 경찰서에 가둔 채 소방호스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학살했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담긴 러시아 정부 문서가 처음 공개됐다. 

  지금까지 러시아 정부 문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 일제의 사할린 학살 사건은 1945년 8월17일 자행된 가미시스카(上敷香) 학살과 같은 달 20~25일에 일어난 미즈호(瑞橞) 학살 등 2건이 유일했다. 

  지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구 소련지역 조사팀장으로 근무했던 이원용(47) 박사는 당시 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최봉섭(崔鳳燮.1906년생) 씨의 시스카(현 포로나이스크) 학살에 대한 증언을 문서 재해독 과정에서 확인했다고 10일 밝혔다. 

▲ 일제 경찰이 한인들을 경찰서에 가둔 채 소방호스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학살했다는 구체적인 증언<중간.우측 사진의 색칠한 부분>이 담긴 KGB 문서가 처음 공개됐다.(자료=이원용 박사 제공)
  1970년 구 소련 국가안전위원회(KGB) 사할린지부는 반일 행위 혐의로 일제 경찰에 의해 투옥됐던 최봉섭 씨를 상대로 가미시스카 학살 사건에 대해 재조사했고 그 내용을 증인심문조서에 남겼다. 앞서 소련군은 가미시스카 학살이 발생한 지 10여일 만인 1945년 8월30일 가미시스카 학살 현장을 한 차례 정밀 검시하고 1946년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했으며, 1970년 KGB가 최 씨를 상대로 재조사에 나선 것이다. 

  증인심문조서에 따르면 최 씨는 KGB 수사관에게 “건물이 불타고, 헌병대가 도망치고 있다고 수감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문을 열어줘 경찰서 감옥을 빠져나왔다”고 진술했다. 

  또한 “수감됐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일본인들이 옆에 있던 연료창고에서 벤진(휘발유)을 가져와 소방호스를 이용해 경찰서 감옥 지붕에 벤진을 뿌렸다고 나에게 말했다(Кто-то из заключённых мне сказал, что японцы из пожарного рукава облили бензином крышу КПЗ. Бензин брали из расположенного рядом склада горючего.)”고 증언했다. 

  이 박사는 “가미시스카 학살은 먼저 한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불을 질러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며 “시스카 학살은 한인들을 산 채로 경찰서에 가두고 소방호스로 휘발유를 뿌린 후 방화한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가미시스카는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총살한 뒤 전쟁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불을 냈으나 시스카 사건은 소련군의 시스카 진주가 임박하자 시간에 쫓기듯 산 채로 불을 질러 학살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 사할린 3대 학살 사건 발생지(배경 이미지=러시아 포털 사이트)

  지리적으로 시스카는 가미시스카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고, 소련군에 밀려 퇴각하는 일제 군경이 퇴로로 활용한 항구도시였다. 소련군은 가미시스카에 먼저 다다랐고 뒤이어 시스카로 진주했다. 시스카 보다 사할린 남부에 자리잡은 미즈호에서는 8월20~25일 사이 한인 학살이 벌어졌다. 

  이밖에도 공개된 KGB 수사 문건에는 시스카 경찰서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신춘우(1927년생), 정연달(1922년생), 정연섭(1927년생) 씨 등 생존자 3명의 기록이 담겨 있다. 

  가미시스카 마을에 살던 신 씨 등은 항일 노래를 만들어 몰래 소지한 혐의로 1945년 6월19일 가미시스카 경찰에 의해 체포된 직후 시스카 경찰서로 이송됐다. 이들은 같은 해 8월20일 최봉섭 씨와 마찬가지로 불타는 시스카 경찰서에서 탈출, 목숨을 부지했다. 

▲ 1920년 4월 참변 당시 무참히 살해된 한인 여성. 이 사진은 이원용 박사가 러시아 정부 문건에서 발견해 본지에 제공한 것으로, 언론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한편 일제가 한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정황도 드러났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일제 경찰은 17일 가미시스카 경찰서에서 한인들을 총살하고 불을 지른 뒤 시스카 경찰서로 이동해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아침 다시 가미시스카로 찾아와 완전 은폐를 위해 다 타지 않은 시신을 타고 있는 석탄더미에 던져 은닉했다. 

  곧이어 시스카 경찰서로 이동한 일제 경찰은 그곳에 머물다 20일 퇴각하면서 한인들을 시스카 경찰서에 가둔 채 소방 호스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뒤 달아나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원용 박사는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누군가의 지시와 명령이 없었다면 이처럼 증거인멸을 확인하기 위해 오고 갈 수 없었을 것”이라며 “가미시스카와 시스카 학살은 일제 경찰이 사전 계획에 따라 조직적으로 자행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수사기록은 한인 학살로 가족을 잃은 유족 김경순 씨(작년 사망)가 KGB의 후신인 러시아연방보안국(FSB) 사할린지부로부터 1995년 입수한 것을 이 박사가 과거사위원회 근무 시절 재입수한 것이다. 

▲ 이원용 박사
  이원용 박사는 증인심문조서를 비롯해 과거사정리위원회 재직 시절 사할린 지역을 방문, 입수한 소련군과 KGB 수사자료를 토대로 지난 2009년 ‘사할린 가미시스카 한인학살사건Ⅰ(북코리아.2009 刊)’을 출간했다. 시스카 경찰서 학살 관련 원문서를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박사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2007년 몇 차례 검증작업을 하면서 시스카 학살사건의 존재를 처음 인지했지만 가미시스카 사건을 알리는데 집중하느라 깊이 있게 조사하지 못했다”며 “그동안 KGB 문건을 재해독한 결과 시스카 사건에 관한 증언을 확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허겸 기자 khur@dongponews.net
               kyoumhu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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