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께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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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께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 연합뉴스
  • 승인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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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께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쿠바 한인독립운동가'의 딸 이르마 림 킴 여사 (서울=연합뉴스) 성기준기자=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애쓰시다돌아가신 선친께서도 꿈에 그리던 조국땅에 다시 묻히게 된 것에 안도하실 것입니다.뒤늦게나마 선친의 유해를 고국의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해준 한국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쿠바지역 독립운동가였던 선친 임천택(林千澤.에르네스토 임.1903∼1985) 선생의 유해를 들고 귀국한 임 선생의 4녀 이르마 림 킴(62) 여사는 26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 내내 동안(童顔)의 얼굴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연신 '그라시아스 아 꼬레아(한국 정부에 감사합니다)'를 읊조렸다.

   임 선생이 쿠바땅을 처음 밟은 것은 멕시코 남부 유카탄반도 에네켄 농장에서의 혹독한 '노예이민' 생활을 끝내고 동료 300여명과 함께 더 나은 삶을 찾아 배편으로 카리브해로 떠난지 20여일만인 1921년 3월 25일. 쿠바 당국의 입국 거부로 10여일간선상에 억류당한 채 나라 잃은 설움을 뼈저리게 겪어야 했던 임 선생 일행은 쿠바남부 마나티항구에 도착, 인근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의 사탕수수 농장에 '계약노동자'로 팔려갔다.

   그러나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보다 임금조건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던 쿠바 사탕수수 농장은 초기 쿠바 한인이민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전년까지 최고조에 이르렀던 국제 설탕가격이 폭락하면서 현지 사탕수수 농장의 폐업이 속출하자 임 선생 일행은 하루 아침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제가 태어나기 전이었지만 나중에 부모로부터 들은 얘기에 따르면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 (노예생활이나 다름없는) 에네켄농장 노동자로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많았다고 합니다"

   1940년대 초 마탄사스에서 태어난 이르마 여사는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꺼내놓으며, 빈곤과 현지인들의 멸시로 점철됐던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회상했다.

   해가 거듭되도록 이민 1세들의 생활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음에도 한인들의 억척스럽게 삶을 일궈 나갔다.

   교육이라곤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한인학교에서 한글을 깨우친 것이 전부였던임 선생은 남다른 학구열과 2세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1925년 마탄사스 농장에 '민성국어학교'를 설립, 교장과 교사로 활동하면서 이민 2세들에게 한글과 우리의 문화를 가르치며 한국혼을 일깨웠고, 이어 카르데나스 지역에도 '진성학교'를 만들었다.

   임 선생은 이어 1932년에는 청년학원을 설립했고, 1938년엔 대한여자애국단 쿠바지부 창설에 앞장서 쿠바에서의 조국 독립운동에 이바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때쯤 어머니(김귀희 여사)를 만나 일가를 이루면서 생활이 차츰 안정되자 본격적인 광복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고, 1934년부터는 상해 임시정부와도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지요"

   실제로 한족단은 그 당시 쿠바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정치활동 인가를 받은 뒤임시정부 후원과 쿠바거주 한인들의 안전보장, 한국독립 승인에 대한 선전작업, 독립후원금 모금 등에 관한 공식활동에 들어가 어려운 형편임에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회 의무금과 광복군 후원금, 독립자금 등으로 상당액을 보내면서 임시정부의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르마 여사는 이에 대해 "아버지는 자나깨나 한국의 독립과 쿠바 한인들의 안전, 한인 2세들에 대한 교육이 주요 관심사였다"며 "오죽하면 광복사업 도모와 인재육성을 목표로 설립한 청년학원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신경쇠약증까지 걸려 학원이 2년동안 문을 닫았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임 선생의 이런 노력은 결국 결실을 거둬 쿠바의 주요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단결하는 계기가 됐으며, 완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우리 말과 문화를 간직해보려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이어지게 됐다.

   임 선생의 9남매 중 장남 에로니모 임(林殷朝.77)은 쿠바 한인 최초로 국립 마탄사스 종합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쿠바혁명에 참가한 공로로 공업부 차관과 동아바나시 인민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고위관리를 지냈으며, 현재 쿠바 한인회장을 맡고 있다.

   3녀인 마르타 림(林殷姬.65) 여사는 국립 아바나대학을 졸업한 뒤 마탄사스종합대 교수를 거쳐 이 대학의 철학부장을 역임한 뒤 '쿠바의 한인들'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으며, 에로니모 임의 차남 역시 국립 아바나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일하고 있을 정도로 임 선생 일가는 쿠바 사회에 탄탄한 뿌리를 내렸다.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알려진 임 선생은 1985년 이국땅에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 뒤 쿠바땅에 묻혔으나 이번에 국가보훈처가 국외안장 독립유공자를 봉환키로 함에 따라 유해로나마 고국으로 되돌아오게 됐다.

   국가보훈처는 1937년부터 독립자금 모금과 쿠바거주 한인동포 권익보호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해 임 선생에게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이번에 다른해외독립운동 선열 유해 4위와 함께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3묘역에 선생의 유해를 안장할 계획이다.

   선생의 유골을 수습해 귀국한 이르마 여사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한국에 대한 향수에 묻혀 지내셨다"며 "후손들이 서툴지만 김치 등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일부 한글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아버지와 같은 이민 1세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또 "쿠바에는 현재 800명 가량의 이민 2,3세들이 전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현지인과의 결혼과 어려운 경제여건 등으로 날이 갈수록'한국적인 것'을 잊어가고 있다"면서 "미수교국 쿠바와 한국 정부가 하루빨리 외교관계를 맺어 한국의 발전상을 한인 후손들이 실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진있음)

   bigpen@yonhap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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